2018. 5. 27.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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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ㆍ중산왕릉 위 우뚝 선 ‘향당’은 동이족의 표식 1974년부터 발굴한 중산왕릉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을 하나하나 풀어보자.


2300년 전 왕릉 설계도(조역도)에 따라 중국 학계가 복원한 착왕(錯王)의 왕릉과 향당 모습. 왕과 왕후, 애후, 부인묘 등이 나란히 조성됐다. 작은 그림은 이형구 교수가 복원한 고구려 장군총의 향당.
먼저 무덤이 석곽으로 조성된 것이다. 무덤에 돌을 쓰는 행위는 우리가 누누이 강조했듯 발해문명권, 즉 동이문화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또한 묘실을 중심으로 아(亞)자형 혹은 중(中)자형으로 묘도를 조영했다든지 하는 것들은 은(상)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예이다. 또한 리쉐친(李學勤) 등 중국 학자들이 검토해왔듯 중산국 영역에서 쏟아지는 은(상)의 유적들과, 우칭셴(武淸縣)에서 확인된 선우황비(鮮于璜碑) 등은 선우·중산국=기자(箕子)의 후예임을 증거해준다.
■ 山자형 청동기의 비밀
자, 이제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산(山)’자형 청동기를 살펴보자. 착왕(錯王)과 성왕(成王)의 무덤에서는 산(山)의 형태를 지닌 청동예기가 모두 11점(착왕릉 5점, 성왕릉 6점) 쏟아졌다. 그런데 중국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이 청동예기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무게다. 삼지창 모양인데, 크기는 119~142㎝, 폭 74㎝ 내외, 무게는 52~57㎏에 달한다. 이 청동예기의 윗부분은 세개의 첨봉(尖鋒) 모양으로 되어있으며, 밑은 원통형이고 옆에는 못구멍을 뚫었는데, 그 원통(직경 13.5㎝ 내외) 안에는 목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 아무리 힘 좋은 장사라도 이렇게 크고 무거운 것을 병기로 휘둘러 적을 제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청동기의 모양도 심상치 않다.
“청동기는 산(山)중(中)이라는 두 글자, 즉 윗부분은 산(山)자, 밑부분은 중(中)자를 표시한 듯한 모양이다. 이것은 왕은 물론 백성들까지 산을 신성시하는 이른바 숭산(崇山)신앙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전국 중산국 영수성지 발굴보고서·허베이성 문물연구소·2005년)
발굴보고서는 “이 청동기가 타이헝(태행·太行)산록에서 기반을 닦은 뒤 중원으로 나가 만승(萬乘)의 두 나라인 조나라와 연나라를 연파한 중산국의 기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 예로 도읍을 정할 때 도읍 한가운데에 산(山)이 있는 곳을 택했는데, 중산국 도읍인 영수성(靈壽城) 안에는 독립된 작은 산이 있다. 이 대목에서 한마디 보태자면 도읍지 중심지와 주변에 산을 두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북악산과 안산, 남산, 북한산, 관악산 등을 둔 서울이 외국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까닭이다. 풍수지리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중국학계는 결국 “산(山)자형 청동기는 중산국의 왕권을 상징하는 예기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봉건사회에 서는 왕권과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문 앞에 예기를 걸어놓는 예가 흔했다. 당나라 때 관직제도에 대해 쓴 ‘당육전(唐六典)’은 “삼품 이상의 고관과 중소주(中小州) 계급 이상의 관아에 예기들을 걸어놓았다”고 했다. 이것은 봉건시대의 등급제도를 표시하는 것인데, 걸어놓은 예기의 숫자에 따라 관직과 신분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중산국의 이 ‘산(山)’자형 청동기는 단순히 왕권과 신분의 상징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해석은 색다르다.
■ 황(皇)과 신라금관


착왕릉에서 확인된 청동 판형으로 만든 조역도. 금은상감으로 제작된 가장 오래된 건축설계도다.
“중 산왕릉 출토 청동 방호(方壺·사각형 항아리 형태의 청동예기)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고전체로 ‘황조문무환조성고(皇祖文武桓祖成考)’라고 새겨진 부분이 있지. 이는 고조 할아버지(皇祖) 문공과 증조 할아버지 무공, 할아버지 환공, 그리고 아버지인 성왕을 뜻하는 것인데요. 자, 주목해서 ‘황(皇)’자를 보세요.”
이 교수에 따르면 고전체(古篆體)인 이 ‘황(皇)’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맨 위에 깃털이 천(川)자 모양으로, 밑에는 일(日), 즉 태양이 새겨져 있으며, 그 밑에는 왕(王)이나 토(土), 혹은 받침대(杆)와 같은 모양으로 돼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을 보면 유우씨(有虞氏), 즉 순(舜)임금은 황(皇)으로 제사를 지냈다(有虞氏 皇而祭)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보면 이렇게 설명했어요. 즉 ‘황(皇)이라는 것은 순(舜)임금 때는 종묘 제사를 지낼 때의 관(冠)을 뜻하는데, 하(夏)나라 때는 수(收)라고 했고, 은나라 때는 우(旴)라 했으며, 주(周)나라 때는 면(冕)이다’라고….”
수나 우·면 모두 관을 뜻한다. 또한 왕롱바오(汪榮寶)는 “황(皇)에서 보는 일(日)의 형상은 관(冠)의 테를 뜻하고, 천(川)의 형상은 관의 장식을 뜻하며, 토(土)의 형상은 그것을 세운다(皇, 日象冠卷 川象冠飾 土象其架)는 뜻”이라고 했다. 근세의 유명한 학자 궈모뤄(郭沫若)도 “황(皇)은 관(冠)이라 하는데 깃털(川의 형상)은 그것을 장식하는 것(皇亦謂冠 羽毛飾之)”이라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황(皇)은 즉 관(冠)을 뜻한다는 기록이다. 이 교수는 “모든 것을 종합할 때 ‘황(皇)’자는 임금이 왕관을 쓴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해석한다.
이쯤해서 산(山)자형 청동예기를 다시 보자.


착왕릉 출토 방호(사각형 청동예기)의 명문 내용. 명문에 나오는 황(皇)자는 왕이 관(冠)을 쓴 모양이라는 해석이 있다.
“청동예기를 나무에 꽂아 세워놨다고 치면 마치 고전체의 ‘황(皇)’자를 연상시키지요. 제가 보기엔 중산국의 상징으로 썼던 이 청동예기는 황, 즉 왕이 썼던 관(冠)과 같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고보니 이 ‘산(山)’형 청동기가 꼭 신라금관의 세움장식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신라금관과 흡사하지. 아닌 게 아니라 신라금관의 모티브가 됐을 수도 있어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BC 210~BC 206년 무렵) 진시황이 죽고 진섭(陳涉)과 항우(項羽)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대거 기자(箕子)의 후예인 준(準)왕에게 망명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자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한국전쟁 때의 피란민 대열에서 보듯 천하가 어지러워질 때는 보다 안전한 곳이나 연고지로 인구의 대이동이 일어나잖아요. 조나라에 망했던(BC 296년) 중산국의 유민(遺民)들이 진(秦)말의 혼란기를 틈타 조선 땅으로 대거 유입되었고, 이들의 후예가 부여, 고구려를 거처 관(冠)의 모티브를 전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잖아요.”
물론 신라금관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이 교수의 해석 역시 숱한 설(說)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향후 연구과제로서 충분한 질문거리를 던졌다고 봐야 한다.
■ 가장 오래된 설계도
중산왕릉 발굴이 던져준 또 하나의 착안점은 왕릉의 설계와 구조이다. 중산국의 최전성기인 BC 310년 무렵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착왕(錯王)의 능에서는 무덤의 기획설계도, 즉 청동판형으로 만든 조역도(兆域圖·길이 94㎝ 폭48㎝ 두께 1㎝)가 고스란히 발굴되었다. 금은상감의 완벽한 상태로 확인된 조역도는 궁전의 명칭과 크기, 위치까지 그려져 있었다. 최고(最古)의 설계도 발견에 건축사학계는 자지러졌다. 조역도엔 “재상 사마주에게 명하노니 능묘건축 때 규정된 촌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하라. 그 자손까지 죄가 이어지게 하라~”는 국왕 조서까지 새겨져 있었다.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거대한 산(山)자형 청동예기(왼쪽 사진). 신라금관의 세움장식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왕릉 위의 향당(享堂)의 존재였다. 향당은 선왕을 제사지내려고 능묘상에 세운 종교적인 목조건축물이다.
“중산왕릉에서 향당이 존재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어요. 향당은 동이족의 전형적인 묘지이거든.”
이미 은나라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의 왕비이자 여장군인 부호(婦好)의 능(인쉬·殷墟)에서 향당의 흔적이 확인된 바 있다. 중산국의 착왕릉를 보면 지하에 왕당(王堂·착왕), 왕후당(王后堂), 애후당(哀后堂), 부인당(夫人堂), 口口당 등 5기의 석곽묘에 시신을 묻은 뒤 각 능묘 위에 5채의 향당이 조성되었다.
“형식을 보면 지하에 묘를 두고, 지표면은 높이 15m의 흙을 판축기법으로 쌓아올린 뒤 대사식고대(台사式高台·높은 누각을 조성한 건물) 3층단의 상부에 조성했어요. 3층 건물의 높은 향당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장대하게 조성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향당은 고구려와 발해, 백제 등에서도 흔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이형구 교수의 설명이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輯安)의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 조성된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이미 1910년대에 장군총을 조사한 바 있는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장군총의) 정상에 기둥을 끼운 흔적들이 있는데, 이것은 난간을 둘러 무덤의 외관을 장엄하게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해석했다.
세키노 다다시는 이때 장군총 정상에서 연화문 수막새 같은 기와편들을 다수 확인했다. 그는 “이런 기와편들은 빗물이 능침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단과 단 사이에 덮은 흔적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장군총뿐 아니라 태왕릉, 천추총, 임강총, 서대총, 중대총 등 고구려 시대 적석총의 정상부에는 어김없이 기와편들이 집중 수습되었다.
■ 고구려에서 확인된 중산의 향당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바로 고구려 적석총 정상부의 난간 기둥 흔적과 기와편, 전돌, 초석 등은 바로 이곳에 능묘상 건축인 향당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본다.
“(장군총의 경우) 한 변의 길이가 31m, 높이 13m 되는 피라미드 위에 장엄하게 보이려고 난간만을 세웠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요. 또한 숱하게 확인된 전돌과 기와편들이 단지 빗물방지용으로 덮은 흔적이라고 하는 것도 어색합니다. 또한 기와편을 보면 상이(上二), 상(上), 십(十) 같은 숫자와 기호들이 적혀 있는데 단지 난간만 둘렀다는 것은 이상하지.”
이 교수는 우메하라 스에지(梅源末治)의 실측도와 평남 순천군 용봉리에 있는 랴오둥성 총벽화, 평남 강서면 약수리 고분벽화에 나온 성곽도 등 각종 자료를 분석, 장군총 향당의 복원도를 만들었다. 이런 향당은 백제 석촌동 고분과 가락동 고분, 발해의 도읍 상경용천부가 있는 산링둔(三靈屯)고분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우·중산국(?~BC 296년)은 은(상)(BC 1600~BC 1046년)으로부터 물려받은 향당제도를 고구려(BC 37~AD 668)·백제(BC 18~AD 660년)→발해(AD 698~926년)로 이어준 발해문명의 전달자 몫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선우·중산국은 이처럼 북방 오랑캐인 백적(白狄)의 나라가 아니라 성씨가 바뀌고 식민지가 되는 등 끈질긴 강대국들의 침략 속에서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작지만 강한 동이(東夷)의 나라였다. 어떤가. 그 역사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오늘의 우리를 쏙 빼닮지 않았는가.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ㆍ朝鮮의 이름을 딴 기자의 후예 선우·중산국 선우·중산국에 대한 역사서를 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춘추좌전’ 소공 12년조의 두예(杜預) 주(注)는 “선우는 백적(白狄)의 별종”이라 했고, 사마정(司馬貞)이 ‘사기’를 주석한 색은(索隱)에는 “중산은 옛 선우국이며 성은 희성(姬姓)”이라 했다. 여기서 백적은 북방의 오랑캐이고, 희성은 주나라 왕의 성(姓)이다. 결국 이 사료에 따르면 선우나 선우의 뒤를 이은 중산은 (은)상, 즉 동이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톈진 우청셴에서 확인된 선우황비문. 선우·중산국=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금석문이다.
하 지만 다른 사서인 ‘속한지(續漢志)’는 “선우는 자성(子姓)”이라 했고, ‘성씨변증(姓氏辯證)’도 “선우는 자성(子姓) 계열이며 은의 후예”라고 했다. 자성(子姓)은 은(상)나라 왕의 성씨이다. 즉 선우(鮮虞·鮮于)는 은나라 후예의 성씨라는 뜻이다. 왜 이렇게 둘쭉날쭉할까. 한 나라의 출자(出自)를 두고 오랑캐(백적)의 별종이라느니, 주나라 왕의 성씨라느니, 다시 은나라 왕의 성씨라느니 혼선을 빚는 것이다. 바로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숱한 침략을 받았던 선우·중산국의 신세를 방증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 춘추전국시대판 창씨개명?
“사서에 따르면 선우국은 춘추시대 때인 BC 660년 무렵 북방 오랑캐인 백적(白狄)으로부터, BC 530년부터는 강대국이었던 진(晉)의 침략을 계속 받았어요. 중산국으로 복국(復國)한 이후인 BC 406년에는 위(魏)의 침략을 받아 20여년간 식민지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선우 중산의 역사가 왜곡되지 않았을까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오랑캐 백적이 선우를 침략한 이후 선우의 족명이 백적의 별종으로 잘못 알려졌고, 원래 주나라의 봉국으로 희씨성을 하사받은 위나라의 식민지가 됨에 따라 희성(姬姓)으로 변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춘추전국시대판 ‘창씨개명’인가. 언뜻 그런 느낌도 들었다.
중산국의 본거지인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시 싼지셴(三汲縣)에서 중산왕릉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1978년 무렵 대만에도 전해졌다. 당시 국립대만대에서 유학 중이던 이형구의 눈이 빛났다. 이미 중산국이 은(상)의 후예가 세운 나라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그였다.
“역사서에 기록된 중산국=은(상)의 후예라는 대목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차였지. 당시 기자조선에 대해 천착하고 있었던 때였잖아요.”
이미 선우가 (은)상의 후예, 즉 다름 아닌 기자의 후예임을 시사하는 자료 하나 하나에 눈길을 주고 있던 때였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기막힌 일이다. 선우국이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딴 것이라니. 그런 와중에 중산국 발굴보고서를 입수한 것이었다. 우선 중산왕릉이 중산왕의 묘곽, 즉 석곽묘의 형태로 발견된 점이 눈에 띄었다. 석곽에 판축봉분의 형태로 조성된 묘제.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검토해왔던 발해문명권의 전형적인 묘제가 아닌가. 또한 왕릉의 ‘중(中)’자형 대묘와 조주분(鳥柱盆·새 모양의 기둥을 박은 그릇), 그리고 옥기문화 등은 은(상)문화와 놀라운 일치를 보였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젊은 고고학도는 1년 뒤 깜짝 놀랄 소식을 접한다.
■ 선우도 기자(箕子)의 후예


중국학계는 선우가 기자의 후예라는 내용을 뺀 비문내용만을 소개하고 있다.
대 륙에서 막 출간된 1979년판 ‘문물’지를 어렵게 입수한 것이다. 당시 대만에서는 이른바 중공 간행물이 철저히 금수되고 있었다. 이 학술지는 이때 중산국 발굴 소식을 비교적 소상하게 담았는데, 대륙의 저명한 역사학자 리쉐친(李學勤)의 글은 이형구를 자극시켰다. “최근 톈진(天津) 우칭셴(武淸縣) 가오춘(高村)에서 발굴된 선우황(鮮于황)비는 ‘선우씨는 상나라 기자(箕子)의 후예다’(鮮于氏系商箕子後裔)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선우=은(상)의 후예인 것도 모자라 아예 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비문이 발굴됐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리쉐친 등은 짤막한 내용만을 전하고는 비문 내용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자료, 즉 중국사회과학원이 펴낸 ‘문물고고공작30년’이라는 책에는 선우황비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왔다.
즉, 1973년 5월 톈진시 우칭셴에서 827자가 새겨진 동한시대의 비석이 확인되었다는 것이었다. 비석 상단에는 고풍스러운 전서(篆書)로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비문에는 동한시대 환제 때인 AD 165년임을 뜻하는 연호(연희·延熹 8년)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감질나는 내용이었다. 책에 실린 비문 탁본은 전체가 아니라 오른쪽 상단이 잘린 채 실려 있어서 전체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특히 비문 주인공의 출자와 성씨, 고향 등을 적은 오른쪽 상단, 즉 비문의 맨 첫 부분을 잘라 놓았으므로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선우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인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잖아요. 얼마나 기막힌지….”
이 교수는 당장 홍콩으로 날아갔다. 전체비문을 탁본한 자료를 입수하기 위함이었다. 수소문 끝에 전체탁본을 구할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탁본의 첫 줄을 읽으니 과연 ‘기자(箕子)’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장주본 탁본 첫머리)
결국 중산국 심장부에서 확인된 중산왕릉 묘의 발굴 성과와 베이징~톈진 사이 우칭셴에서 발견된 선우황비는 은(상)과 선우·중산국, 기자조선의 삼각함수를 풀 결정적인 열쇠가 된 것이다. 즉 ‘선우=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역사를 복원할 때 문헌은 움직일 수 없는 귀한 자료다. 하지만 명문이라고 하는 금석학 자료와는 결코 견줄 수 없다. 문헌은 전해 내려오면서 조작이나 왜곡, 오류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명문(금석문)은 당대에 당대인들이 직접 쓴 기록이기 때문이다.
■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의 희생양 된 선우황비


비석의 주인공인 선우황(鮮于황)이 은(殷)나라 기자의 후예라는 사실을 기록한 비문내용.
여 기서 선우황비 발견을 둘러싼 ‘쌉싸래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본다. 중국 현대사가 안고 있는 지울 수 없는 어두운 과거사이다. 우칭셴에서 선우황비가 확인된 때는 바야흐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1973년 5월 우칭셴 가오춘 인민공사 란청(蘭城)대대 사원이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선우황묘비를 발견한다. 톈진 역사박물관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비는 높이 2.45m, 폭 81㎝, 두께 12㎝나 되는 엄청난 크기였다. 비석의 주인공인 선우황은 AD 107~113년 사이 지금의 산시(山西)성 다이셴(代縣) 부근을 관할하는 안문(雁門)태수가 되었고, 125년 81살을 일기로 죽는다. 비석은 그가 죽은 지 40년 뒤(165년)에 손자가 세운 것이다. 죽은 자를 추념하는 비문이므로 당연히 온갖 달콤한 수식어가 동원되었던 게 당연하다. 그런데 1974년 톈진시 문물관리처 우칭셴 문화관은 ‘문물’지라는 학술지에 희한한 내용의 글을 싣는다.
“(발굴이 끝난 뒤) 문물관리처, 현(縣) 문화관, 란청대대의 동지들이 이 비문을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의 반면교재로 삼았다. 그래서 비문이 출토된 현장에서 란청대대원과 빈하중농들이 함께 모여 비림비공 대회를 열었다.~”
이 내용을 담은 쪽글의 소제목이 ‘비문을 반면교재로 삼고 린뱌오(임표·林彪)와 그가 선양하려 했던 공맹의 가르침을 호되게 비판하다(以碑文作反面敎材 狼批林彪和他宣揚的孔孟之道)’이다.
비문 하나 발견한 것 가지고 비림비공운동을 펼칠 만큼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극에 달할 때였다. 글에 실린 비판 내용을 보면 섬뜩하다.
우선 유심주의적 천명관을 고취시켜 착취계급의 인민통치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또 인정(仁政)과 예치(禮治)를 선양, 반혁명정치의 사기극을 연출했으며, 역사를 마음껏 왜곡하여 지주계급의 죄상을 덮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우황비를 세운 자는 봉건통치를 유지하는 입장에서 주인의 공덕을 기려 독초와 같은 유가반동사상을 퍼뜨렸다는 얘기다. 그 예로 비가 세워졌던 동한(東漢)시기 선우황이 다스렸던 “안문군에서는 기근이 심해서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人相食) 지경에 이르렀다”는 후한서 ‘안제기(安帝紀)’를 인용하기도 했다.
학술지는 한술 더 떠 “무도한 자의 행위는 그들의 바람과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마오쩌둥 주석의 어록까지 굵은 글씨로 인용했다. 선우황비가 만들어진 지 불과 19년 만인 AD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끝내 멸망했음(AD 220년)을 빗댄 것이다.
19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기자(箕子)의 후예는 이렇게 공맹과 린뱌오(임표)의 추종세력으로 찍혀 졸지에 문화대혁명의 희생양으로 수모를 겪은 것이다. 하기야 아무리 저명한 학자나 정치가도 수정주의자, 주자파, 공맹·린바오 추종세력으로 찍히면 비참한 꼴로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던 광란의 시기였으니….
■ 중산국에 즐비한 은(상)의 흔적
또하나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어느 학술지에도 기자와 관련된 탁본 내용이 실리지 않는다는 거지. 중산국이 기자의 후예였음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겠지.”(이 교수)
어떻든 이 선우황비가 발견됨으로써 선우·중산의 선조 논란과 성씨 논란은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리쉐친 등 중국 학자들도 선우황비뿐 아니라 중산군 근처에서 잇달아 출토되는 은(상)나라의 유적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산의 땅으로 판명된 정딩(正定)시 신청푸(新城鋪) 유적에서는 명문이 있는 상나라 청동기가, 가오청(藁城)시 시타이(西臺) 유적에서는 상나라 청동기와 옥기가 세트로 확인된다. 또한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石家庄)시에서는 27곳의 상나라 유적이 확인되었다.”(리쉐친)
이형구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 은(상)나라 후예인 자성(子姓)의 선우국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혹시 이 지역은 은(상)나라 시절 은(상)의 제후국인 기자의 기국(箕國)이 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은(상)이 멸망하자 기자(箕子)는 첫째 아들과 옌산산맥을 넘어 본향, 즉 고조선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기자의 둘째 아들은 타이헝(태행·太行)산록에 숨어 들어 이 선우·중산국 영역에서 은(상)의 복국(復國)을 꿈꾸지 않았을까.”
이 교수의 이야기를 한번 조목조목 풀어보자.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ㆍ전쟁 뿐 아니라 문화도 찬란했던 ‘강소국’ BC 307년, 조나라 무령왕(재위 BC 325~BC 299년)이 신료들을 부른다.
“…지금 중산국이 우리나라 한가운데 버티고 있고(我腹心)…사직이 망하게 생겼으나 나는 호복(胡服)으로 갈아 입고서라도 그들을 치고자 합니다.”(사기 조세가)
벌집을 쑤셔놓은 발언이었다. 호복이라니. 주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고 뭘 어찌하겠다는 건가?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아우성친다. 그러자 무령왕이 설득에 나선다.
■ 중산국을 타도하라!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법(호복기사·胡服騎射)을 가르치려 하는데 무슨 잔말이 많소?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우임금은 옷을 벗고 나국(裸國)에 들어갔었소. 그분들은 덕정을 선양하기 위해 그러셨소. 설사 세상의 비웃음을 받더라도 난 반드시 오랑캐 땅, 중산을 반드시 차지할 것이오.”(雖驅世以笑我,胡地中山吾必有之)


4마리 용과 4마리 봉황을 금은으로 상감한 책상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조 무령왕이 중산을 오랑캐(이족)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설하고 무령왕은 기어코 호복을 입었으나 왕족들까지도 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무령왕은 숙부인 공자 성(成)을 직접 찾아가 ‘호복기사’ 정책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숙부님, ~과거에 중산국이 제나라의 강병을 등에 업고 우리 땅을 침입해 짓밟았으며, 백성들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내 호 ()성을 포위했습니다.(引水圍) 사직의 신령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호성(城)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선왕께서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아직 복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호복을 입고 기병과 사수(射手)로 방비하면 나라를 지킬 수 있으며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조카의 간곡한 설명에 감화를 받은 공자 성은 이튿날 스스로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의 전말이다. 조나라가 예법을 찾는다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다녔던 구태에서 벗어나 간편한 옷(바지 형태)을 입고 말을 타서 활을 쏘는 이른바 기병작전을 펼친 것이다.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으로 전국7웅 가운데 선두주자로 나선다. 그런데 기록에서 나타났듯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 배경에 중산국이 있었다. 전국시대 때 세치 혀로 6국의 재상이 된 소진(蘇秦)의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지난날 중산국은 나라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서 연나라와 조나라를 맞아 남쪽 장자(長子·산시성 진양·晋陽) 땅에서는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중산국은 겨우 천승(千乘)의 나라였는데, 두 만승(萬乘)의 나라(조나라와 연나라를 지칭)를 이겼습니다.~”(전국책 ‘제책·齊策’)
하지만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을 시행한 뒤(BC 307년)부터 BC 296년까지 해마다 중산국을 정벌한다. 선우국이던 춘추시대 때는 진(晉)의 침략으로 고난의 나날을 걸었고, 그 후 위나라의 침략에 급기야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됐으며(BC 406년) 20여년 만에 나라를 회복한(BC 380년쯤) 중산국. 그 중산국은 다시 조나라의 내침을 받아 끝내 멸망하고 만다.(BC 296년)
■ 집단 따돌림 극복한 강소국
중산국은 이렇게 춘추시대부터 강대국들의 ‘집단 따돌림’을 받고 결국 두 번이나 멸망했지만 대책 없는 약소국은 아니었다.


잔 15개를 장식한 촛대
“70~80 년간, 즉 위나라로부터 해방된 때(BC 380년)부터 최종 조나라에 멸망(BC 296년)할 때까지 강대국 조나라와 연나라를 괴롭히면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강소국’이었지. 오죽했으면 조 무령왕이 이를 갈며 오랑캐의 옷까지 입고 ‘타도 중산국!’의 기치를 올렸을까.”(이형구 교수)
1974년 허베이성(河北省) 핑안(平安) 싼지셴(三汲縣)에서 확인된 중산국 유적(왕릉+성터)의 위용은 우리의 역사를 빼닮은 ‘강소국’ 중산의 찬란한 문화를 대변해준다. 이 유적에서는 3기의 왕릉을 포함, 30여기의 무덤과 1만90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졌다.
가장 중요한 유물들이 바로 중산왕 착(錯)의 무덤에서 확인된 철족대정(鐵足大鼎·다리는 쇠, 몸통은 청동으로 만든 예기) 및 방호(方壺·사각 항아리형의 예기)에 새겨진 명문이다. ‘강소국’ 중산의 역사를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먼저 방호의 명문을 살펴보면 “14년, 중산왕 착(錯)이 재상인 사마주(司馬주)에게 명을 내려 ‘연(燕)나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구리)으로 제기를 만들라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무려 469자(77행)가 새겨진 철족대정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옛날에 연나라 왕 쾌(쾌·재위 BC 321~BC 316년)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위를 내줘 나라를 잃고 그 스스로도 목숨을 잃었다.~이에 어린 왕을 보좌한 (중산국) 재상 사마주가 삼군지중(三軍之衆), 즉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토벌, 500리 땅과 성 10곳을 빼앗았다.”
명문은 기존 역사서를 보충하고 오류를 잡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해낸다. 이 명문 내용과 기존의 사서를 토대로 당대의 역사를 복원해보자.


중산국이 만든 방호(사각항아리 형태의 예기).
“(당 시) 연왕 쾌는 재상 자지를 너무도 신임한 나머지 300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고관의 임용권을 자지에게 주었다. 권력을 손에 쥔 자지는 마침내 국왕의 직권을 행사한다. 자지가 왕권을 차지한 지 3년이 되는 해(BC 314년) 태자와 신하들이 변란을 일으켰고, 연나라는 수개월간 혼란에 빠진다. 이때 맹자가 제나라 왕에게 ‘연나라를 빨리 치라’고 간언한다.”(사기 연소공세가)
제나라 선왕(宣王·재위 BC 320~BC 301년)은 즉시 5도의 군사와 북지지중(北地之衆·북방의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 대승을 거둔다. 이때 연왕 쾌와 만 2년간 왕위에 올랐던 자지가 죽는다.
“바로 사기에 기록된 ‘북지지중’, 즉 북방의 군사라는 표현이 중산국의 군사일 것입니다. 중산왕릉 명문에 나온 삼군지중과 사기의 북지지중이 일맥상통합니다.”(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중산국의 연나라·조나라 정벌은 아마도 제나라와 연합으로 이뤄졌으며 연과 조는 이때 거의 멸망의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명문제기들은 연나라를 격파하고 의기양양해진 중산왕 착(錯)이 “연나라에서 빼앗은 구리(銅)를 택해 제기(대정)를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산왕릉 출토품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 예기엔 강대국 연나라를 치고, 의기양양해서 연나라의 구리를 택해 제기를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2300년 된 술, 개목걸이 장식까지 “왕릉 3기는 착왕(錯王)과 그의 아버지 성왕(成王), 할아버지 무공(武公)의 것으로 이뤄졌어요. 그런데 착왕의 묘에서는 천자를 뜻하는 구정(九鼎), 즉 정(鼎)이 아홉개나 나왔지. 주례(周禮)의 규정에 따르면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대부는 5정, 사(士)는 3정을 갖도록 규정해놓았거든. 이를 ‘열정(列鼎)’제도라고 하는데, BC 323년 중산국이 조·위·한·연과 더불어 왕(천자)을 칭했음을 방증해주는 결정적인 자료지. 또 다리는 철제로, 몸통은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놀라운 주조기법도 특기할 만해요.”(이형구 교수)
또하나 착왕의 철족대정 속을 분석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양, 돼지, 개 등의 고기를 삶은 결정체가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아마도 제사용 고기를 삶은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또 있다. 출토품 가운데 밀폐된 술병들 이 다수 나왔고, 그 안에서는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두 개의 병을 열자 야릇한 술냄새가 나지 않은가. 성분 분석을 해보니 2개의 병에는 알코올 성분이 있었는데, 곡주(穀酒)일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2300년 된 술이 처음 발견된 것이어서 흥미를 끌었다.
특히 ‘중산주(中山酒)’는 “한번 마시면 3년 동안 죽은 듯 무덤에 묻혀 있다가 깨어날 정도이며, 3년 후 깨어난 사람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술냄새에 3개월간이나 취할 정도”라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사냥에 동원된 마차가 2~3대 확인됐다는 점. 그런데 금·은으로 만든 목걸이를 찬 목에 찬 개 2마리의 뼈가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착왕은 애견가였겠지. 문헌에 따르면 중산에서는 북견(北犬)을 생산했고, 중원에서도 중산의 북견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2300년 된 중산주(中山酒)를 담은 술병.
출 토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도 예약제도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전국 12웅에 들 만큼 강국이었고 조와 연나라를 떨게 했던 중산국이었던 만큼 그에 걸맞은 무기들이 쏟아졌다. 청동검과 청동도끼, 청동꺾창, 노기(弩機·화살을 연발로 쏘는 장치), 철촉은 물론 천승의 나라에 걸맞은 전차가 8량, 그리고 24필의 말이 부장됐다.
“이렇듯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무엇보다 철과 동을 접합하는 기술, 그리고 다양한 방법의 주조·용접·금은상감기법 등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작품들이 즐비해요. 전국시대 최고의 예술과 주조기술을 갖춘 강국입니다. ”(이형구 교수)
■ 아홉구멍에 넣은 옥(玉)
특히나 금은으로 상감하는 솜씨를 보면 중산국의 찬란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4마리 용과 4마리 봉황을 금은으로 상감한 책상(金銀象嵌龍鳳方案)과 잔 15개를 차례로 장식한 촛대(十五連盞燭臺),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격인 중산국의 창우(倡優)를 표현한 촛대, 그리고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표현한 병풍꽂이 등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솜씨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중산국의 사냥개. 목에 금·은 목걸이를 찬 상태로 발굴됐다.
“옥 석(玉石)제품은 또 어떻고. 옥으로 만든 구슬과 옥결(귀고리), 황(璜·반원형의 패옥) 등을 합쳐 3000여점이나 쏟아졌어요. 옥은 예로부터 불멸의 상징이잖아요. 옥제품도 인물·용·봉황·뱀·거북이·호랑이·누에·달팽이 등 얼마나 다양한지….”(이교수)
그런데 이 옥장식품들은 장식으로서의 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박자(抱朴子·신선방약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에 따르면 “금옥(金玉)이 9개 구멍에 있으면 죽은 자는 썩지 않는다”고 했다. 중산 왕릉과 그 배장묘에 출토된 옥기의 경우 ‘시신의 구멍(규·竅)’, 즉 눈(2)·귀(2)·코(2)·입(1) 음양(2) 등에 집어넣어 죽은 자의 기운을 보호했다.
한데….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중산국과 그 문화가 아무리 휘황찬란하다 한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중산국과 그 문화, 그리고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보자. 30여 년 전, 타이완 유학 시절(국립타이완대) 이형구 교수가 풀기 시작했던 중산국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ㆍ고조선문화 토대로 창조 독특한 발해연안 청동검 이쯤해서 ‘삼국유사’(제1권 고조선 왕검조선조)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단군 왕검은)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무왕을 뜻함)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 산신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해왔던 각종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다면 아주 흥미로운 시사점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시기는 BC 1046년쯤이다. 물론 이 연대는 최근 중국 측의 하·상·주 단대공정으로 결정된 것으로 100%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그쯤(BC 1046년)을 기준으로 단군왕검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을 더한다면 BC 2600년쯤이 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단군 이전, 즉 환인과 그 아들 환웅, 그리고 곰이 변해 사람이 된 웅녀(熊女)의 시대를 감안해보자. 즉 곰신앙이 움텄고, 천·지·인을 소통시키는 무인(巫人)이 지배하는 제정일치 사회가 개막하기 시작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시대를 연상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환인→환웅↔웅녀→단군 시대, 즉 훙산문화를 모태로 단군조선, 즉 고조선이 성장했다. 여기서 단군은 물론 지도자, 즉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이 ‘단군’ 가운데 ‘왕검’이라는 분이 단군조선의 시조라는 뜻일 게다.
그런데 BC 1600년쯤 단군조선 영역에서 출발한 동이족의 일파(성탕·成湯)가 중원의 하나라를 멸하고 은(상)을 세웠다. 그러니까 동이족이 험준한 옌산(연산·燕山)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천하를 양분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다 중원의 동이족 나라인 은(상)이 주(周)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자 은(상)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이른바 종선왕거(從先王居), 즉 선조의 본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발해연안식 청동검이 출토된 난산건 유적 전경. 웬일인지 표지석에는 난산건 유적임을 알리는 글자가 훼손돼 있다. | 이형구 교수 촬영
물 론 옌산 북부, 즉 발해연안엔 고조선, 즉 단군조선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조선이 단군왕검 이후 1500년 동안 존속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이를 입증해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기·승·전·결을 갖춘 제국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는 역사”라는 신화학자 양민종 교수(부산대)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것은 “중원 하나라(BC 2070~BC 1600년) 시절 발해연안에 하나라의 규모와 맞먹는 거대한 나라가 존재했다”고 인정한 쑤빙치(소병기·蘇秉琦) 등 중국학계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식민사관에 따라 단군신화를 신화로만 보았던 것이 잘못이지. 단군신화를 역사로 보고 연구해야 했는데 그게 안됐어요.”(이형구 교수)
그렇다면 기자(箕子)가 종선왕거, 즉 선조의 본향으로 돌아왔을 때 단군조선과는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뤘을까. 다시 ‘삼국유사’로 돌아가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단경으로 옮겨가~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됐다”는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도로 발전한 은(상)의 문화로 무장한 기자족은 지금으로 치면 엘리트 계층이었겠지.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기자가 오자 단군이 장단경으로 옮겨가 결국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정권이 기자에게 돌아갔다는 뜻이 아닌가. 이때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교체되는데 우리는 기자가 단군과 같은 동이족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이형구 교수)
물론 갈등도 있었겠지만 같은 핏줄인 토착세력(고조선)과 은(상)의 유민(遺民)들이 곧 조화를 이루며 살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 답을 우리는 고고학 발굴성과로 풀어야 한다.
■난산건에서 쏟아진 청동무기들
1958년, 랴오닝성 닝청셴(寧城縣·지금은 네이멍구 자치구) 쿤두허(坤都河) 상류에 있는 난산건(남산근·南山根)에서 한 기의 무덤이 확인된다. 석곽이 있고 그 안에 목관의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에서는 모두 71점의 청동기가 확인됐다. 5년 뒤인 63년 6월, 한 농부가 그 무덤에서 서쪽으로 120m 떨어진 곳에서 2기의 무덤을 더 발견한다. 그로부터 다시 3개월 뒤인 9월14일. 조·중 합동 고고학 발굴대가 이곳을 찾는다. 북한과 중국의 합동발굴이었다.(경향신문 2007년 12월8일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랴오허 동서쪽의 적석총들’ 참조)
조사결과는 무척 흥미로웠다.
“전형적인 은말주초의 청동예기는 물론 토착(고조선)세력, 그리고 중국 북방의 영향을 받아 만든 청동기들이 쏟아진 겁니다. 청동솥의 다리가 날씬해지고 길어졌다든지, 은말주초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른 항아리(雙聯罐·작은 단지를 이은 항아리), 뼈로 만든 구슬(骨珠), 금으로 만든 고리(金環) 등이 나왔다든지….”(이형구 교수)
두번째 중요한 변화는 무기의 다량 출토이다. 청동투구와 청동꺾창, 청동화살촉, 청동검, 청동도끼 등이 쏟아진 것이다. 은말주초의 청동기가 조상신, 하늘신에 대한 제사 위주의 예기였다면 난산건 유물은 다양한 지역 문화가 융합된 예기와, 전쟁에 쓰인 무기가 공반된 것이 특징이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난산건 문화(샤자뎬상층문화에 해당)는 BC 9~BC 7세기 사이에 유행한 문화예요. 그런데 잘 살펴봅시다.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를 검토해야죠.”(이형구 교수)
춘추전국시대라. 다시 문헌을 검토해보자. 무왕의 건국(BC 1046년) 이후 17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서주는 10대 여왕(려王·재위 BC 877~BC 841년)에 이르러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여왕이 부정부패의 화신으로 정권을 농단한 영이공(榮夷公)이라는 인물을 기용한 게 화근이었다. 여왕은 듣기 싫은 직언을 금하고 비방하는 자를 죽이자 백성들은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충신 소공(召公)이 간했다.

난산건 유적에서 출토된 뼛조각. 짐승·사람문양과 함께 2대의 수레 문양이 새겨져 있다.(왼쪽) 그런데 이 수레 문양은 한자(漢字)인 ‘수레 거(車)’자의 원형을 표시하는 상형문자들과 흡사하다.(위)
“백성의 입을 막는 건 물을 막는 것보다 나쁩니다. 물이 막혔다 터지면 피해가 더 많지 않습니까. 치수하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을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을 이끌어 말을 하게 합니다. 백성이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왕은 듣지 않았다. 3년 뒤 마침내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여왕을 습격했다. 여왕은 체(체·산시성 훠셴:縣)로 달아났다. 이때부터 소공과 주공(周公·무왕때 주공의 둘째아들 후손) 등 두 재상이 나라를 14년간 다스리니 그 시대를 공화(共和)라 한다. ‘공화정’의 시효라 할 수 있다. 두 재상은 14년 뒤 성장한 여왕의 아들 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39년 뒤 다시 강족(姜族)의 침략을 받고 대패한다.
이 때부터 천하에 혼란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그러다 선왕의 뒤를 이은 유왕(幽王·재위 BC 782~BC 771년)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다.
엄연히 정처(왕후·申侯의 딸)와, 그 사이에 낳은 태자(의구·宜臼)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는데, 그만 애첩 포사(褒사)를 너무도 사랑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포사를 정처로, 그가 낳은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으려 획책한다.
그런데 포사라는 여인은 용(龍)의 타액이 주나라 후궁의 몸에 들어가서 태어난 인물. 용의 타액은 주나라의 손에 망한 포나라 선왕(先王)의 변신물이라 하는데, 일설에는 망한 포나라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주 유왕의 품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쨌든 유왕은 좀체 웃지 않는 포사의 환심을 사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가 한가지 묘수를 알아냈으니 바로 봉화를 올리는 것이었다. 봉화를 피우자 제후들이 난리가 난 줄 알고 뛰어왔다가 거짓인 줄 알고 투덜댔다.
그런 제후들의 모습에 포사가 깔깔거리며 웃지 않는가. 유왕은 “옳다구나, 이거다” 싶어 계속 봉화를 피웠다. 마침내 제후들은 짜증을 내며 봉화를 올려도 달려오지 않았다. 비극의 서막이었다. 유왕이 포사와 백복을 왕후와 태자로 삼으려 하자 정처인 신후는 증(繒)나라와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유왕이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양치기 소년’을 믿지 않았다.
유왕은 결국 죽었고, 제후들은 원래 태자인 의구를 왕위에 세웠으니 그가 바로 평왕(平王·재위 BC 771~BC 720년)이다. 평왕은 BC 770년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낙읍(洛邑·뤄양 洛陽)으로 동천했다. 바야흐로 동주(東周)시대의 개막이다.
■청동단검의 전통
하지만 천자의 권위는 회복 불능 상태로 빠졌고, 천하는 제후들간 약육강식의 시대로 접어든다. 제(齊), 초(楚), 진(晋), 진(秦)이 강대해졌고, 정권은 방백(方伯·제후들의 우두머리)에 의해 좌우된다.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것이다.(사기 주본기)

난산건 출토 청동솥(鼎). 은말주초의 전형적인 청동솥과 비교하면 다리가 길고 날씬한 편이다. 고조선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무려 170여개의 소국이 난립했다고 합니다. 대혼란기에 접어든 것이죠. 천자를 모시는 예악(禮樂)이 무너지고, 힘이 천하를 지배하는 전쟁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이형구 교수) 이 교수가 예로 든 것이 바로 서주말 동주초의 유적인 뤄양(洛陽) 중저우루(中州路)의 시궁돤(西工段) 주나라 무덤이다.
“260기의 무덤 가운데 청동예기를 부장한 무덤이 9기인데, 청동병기를 수장한 예는 19기가 됩니다. 이것은 청동예기 시대에서 병기시대로 옮겨졌음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가 됩니다.”
바로 여왕~평왕 사이, 즉 BC 9~BC 8세기 무렵에 대혼란의 시기, 즉 전쟁의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헌과, 중원(뤄양)은 물론 발해연안(난산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발해연안 난산건에서 확인된 병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물은 바로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른바 비파형 청동단검)이다.
“발해연안식 청동검이야말로 고조선 청동기문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지. 이런 형태의 청동단검은 난산건을 필두로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 ·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집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시 서포동을 비롯해 황해북도 연안군 부흥리 금곡동과 충남 부여군 송국리, 전남 여천시 적량동 등에서도 보입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청동단검이 석관묘와 석곽묘, 그리고 적석총 등 모두 우리의 전통 묘제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또한 난산건에서 확인된 유물 가운데는 역시 동이의 전통문화의 하나인 복골(卜骨)이 있다는 것이다. BC 9세기부터 시작된 이 청동단검의 전통은 한반도로 이어져 급기야 ‘한국식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낳는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대표격인 이 세형동검이 출현한 시기는 BC 4세기 무렵이다. 결국 발해연안식 청동단검과 세형동검은 샤자뎬 하층문화~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 즉 고조선이라 토대에서 창조된 독특한 문화인 것이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ㆍ‘천하통일 상징’ 청동솥은 신앙의 대상 그렇다면 기자(箕子)가 은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찾아간 본향, 즉 고죽국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고고학 자료와 문헌을 잘 따져보자.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기자가 돌아간 옛 조상의 땅으로 대략 4곳을 꼽는다.

카줘 베이둥 2호 교장갱에서 확인된 짐승 문양의 청동솥(정). 정은 원래 정권의 상징물이자, 천·지·인을 연결해주는 보물로 여겨졌다. <선양 | 김문석기자>
먼저 롼허 하류설. ‘사기정의(史記正義·주석서)’는 “고죽성은 노룡현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은나라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城在盧龍縣 南十二里, 殷時諸侯孤竹國也)”이라 했다. 누룽셴은 오늘날의 롼허 하류에 있다. 두번째는 산하이관(山海關)설. ‘요동지(遼東志)’ 지리지는 “순임금~하나라 땐 북기(北冀)의 동북을 분할하여 유주(幽州)라 했고, 상(商)나라 때는 고죽국이라 했다”면서 “위치는 산해관(山海關) 동쪽 90리, 발해 연안에서 20리 떨어진 곳”이라 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의 진시셴(금서현·錦西縣) 첸웨이(前衛) 일대이다.
세번째는 카줘(喀左) 일대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서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청나라 시대 여조양(呂朝陽)은 “영지현은 바로 객자심좌익(喀刺沁左翼·지금의 카줘셴)”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차오양(朝陽) 일대설. ‘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는 “유성현(柳城縣)은 원래 상나라 고죽국(本商孤竹國也)”이라 했다. 그런데 유성현은 고죽영자(孤竹營子)라는 지명이 보이는 차오양 서남이다. 카줘셴·젠창셴(建昌縣)·진시셴(錦西縣) 등 3개현의 경계 지점이다.
카줘 베이둥에서 ‘고죽’명 청동기가 발견된 곳을 현지 사람들은 구산(고산·孤山)이라 한다. 고죽국 명칭과 관련시켜보면 수상한 대목이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4곳은 한결같이 은말 주초의 청동기가 발견되고 있는 지점과 일치한다. 기자(記者)는 이쯤해서 몇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은 유민들은 그 무거운 청동기들을 짊어지고 험난한 옌산을 넘었을까.
■ 청동솥(정)의 비밀
“다링허 유역 교장갱 청동기를 봅시다. 모두 세발 혹은 네발 달린 청동솥(정·鼎)을 중심으로 술그릇, 술잔, 물그릇 등 주로 제사 지낼 때 쓰던 예기(禮器)라는 게 특징입니다. ‘기후’명이 새겨진 사각형 모양의 청동솥(방정·方鼎)은 31㎏이나 나가는데….”(이형구 선문대 교수)
여기서는 우선 청동솥을 주목하고자 한다. 주나라가 은을 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구정(九鼎·천자가 도읍에 모신 아홉개의 정)을 주나라 도읍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예전에 복희는 신정(神鼎) 하나를 만들었는데, 통일과 천지만물의 귀결을 뜻했습니다. 또한 황제(黃帝)는 보정 세 개를 만들어 천·지·인을 각각 상징하셨습니다. 하우(夏禹)는 구주(九州·9부족)의 금속을 모아 아홉개의 정을 만드셨습니다(九鼎). 어진 군주가 나타나면 정이 출현하고, 사직이 황폐해지면 정은 땅 속에 묻힙니다.”(사기 효무본기) 그래서 구정은 국가를 상징하기도 했다.

발해 연안에서 현지인들의 영향을 받아 형태가 바뀐 귀달린 새 문양의 청동솥(정). <선양 | 김문석기자>
한 무제 때의 일. 분음(汾陰·산시성 완잉셴)의 무사(巫師)가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내다 문득 땅을 보니 무언가 갈고리 같은 것이 삐져나온 걸 보고 흙을 파보았다. 지금으로 치면 우연한 기회에 고고학에서 말하는 긴급발굴을 벌인 셈이었다. 그 결과 뜻밖에 ‘고고학적 성과’를 얻는다. 명문은 없고, 꽃무늬만 조각된 솥이 확인된 것이다.
여기서 기자(記者)가 주목하는 대목은 예로부터 동방의 신으로 일컬어진 복희가 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 중국인들은 황제 또한 발해문명의 창시자이며, 동이계열이라고 하지 않는가. 황제가 천·지·인을 상징하는 정을 만들었다는 대목에서 훙산문화(BC4500~BC 3000년)가 연상되지 않는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연결하는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된 바로 그 훙산문화.
게다가 BC 3500년 전 유적인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좐산쯔(轉山子)의 청동 찌꺼기(동사·銅渣)와, 탕산(唐山) 다청산(大城山)에서 확인된 BC 2000년 전의 순동(純銅)장식 2점 등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바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동아시아 청동기 제작의 원조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구정의 경중을 묻다

역시 발해 연안에서 제작된 띠를 두른 귀달린 항아리. <선양 | 김문석기자>
석 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갔다는 것은 인류문명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은(상)은 바로 그 최첨단 무기인 청동기로 하나라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청동 예기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청동솥은 천하통일의 상징이었으며, 천·지·인을 연결하는 신비의 보물이었다. 은(상) 무정제(재위 BC 1250~BC 1192년)의 일. 그가 성탕(상나라 초대왕)에게 제사를 올리자 꿩이 날아와 정의 손잡이에 앉아 울었다. 무정제가 불길하게 여기자 신하 조기(祖己)는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라고 간했다. 무정제는 이 일을 거울삼아 덕정을 베풀었고, 나라가 흥성해졌다. 그 뒤로도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청동솥을 손에 넣으려 했던 역대 황제 및 왕들의 투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진시황은 천하를 평정한 뒤 사수(泗水·산둥성 취푸 曲阜에 있는 강)에 빠졌다는 주나라 정을 꺼내기 위해 무려 1000명을 물 속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얻지 못했다.(사기 진시황본기)
또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융족을 멸한 뒤 한껏 기세를 올리면서 주나라 도성 교외에서 열병식을 열었다. 때는 바야흐로 천자국인 주나라가 쇠퇴했던 시기. 주 정왕(BC 607~BC 586년)은 신하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장왕(莊王)을 위로했다. 천자이지만 제후인 장왕의 기세에 눌린 것이다.
초 장왕은 한껏 거들먹거리면서 ‘구정(九鼎)의 경중(輕重)’을 묻는다. 이것은 “내가(초 장왕) 구정을 들고 갈 수도 있다”, 즉 “천하가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냐”며 은근히 주나라를 협박한 것이다. 하지만 왕손만은 “(천하를 손아귀에 쥐는 것은) 덕행에 있지, 구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일축해 버린다. 주 천자만이 ‘왕(王)’을 칭하였는데 초나라가 무왕(BC 740) 이래 왕을 잠칭(潛稱) 함을 빗댄 말이다.
“덕행을 행하면 구정이 무거워져 들 수 없고, 세상이 혼란하면 구정이 가벼워집니다. 주왕실의 덕정이 비록 미약해졌다지만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주 천자의 권위가 살아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후대 한나라 신하들도 무제에게 “보정만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모셔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을 만큼 정(청동솥)은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 더욱이 조상신, 하늘신에 대한 제사를 끔찍하게 여겼던 은(상) 사람들에게는….

랴오닝성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은말 주초의 청동기들. 기자(箕子)족이 가져온 청동기는 물론 발해 연안 현지에서 토착세력(고조선)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청동기들도 다수 있다. <선양 | 김문석기자>


■ 기자조선은 랴오허를 건너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자가 이끈 은(상)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 본향으로 도망갔을 때 기자족의 정을 비롯, 예기를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은말 주초의 청동기, 즉 기자 일행이 묻은 청동기는 왜 그렇게 정연한 모습으로 발견됐을까.
아마도 천신만고 끝에 청동예기들을 들고와 제사를 지내던 은(상)의 유민들은 모종(周족의 침입 등)의 갑작스러운 변고를 겪었을 것이다. 너무도 급한 나머지 무거운 예기들을 들고 갈 수 없었기에 이것들을 땅 속에 정성껏 묻어두고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 일행은 다시 동으로 동으로 향해, 중국학계가 정설로 여기는 대동강 유역에서 기자조선을 창업했을까.
“아니지. 은(상)의 청동기는 랴오허(요하) 이동(以東)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랴오허를 건너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기자조선의 영역은 랴오둥 이서(以西) 지역이었다는 뜻이에요.”(이형구 교수)
여기서 한 가지 착안해야 할 대목은 베이둥이나, 산좐쯔, 샤오좐쯔 등에서 출토된 은말 주초의 청동기 가운데는 은 유민들이 남부여대하며 가져온 제기와 함께 현지, 즉 다링허 연안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들이 일부 보인다는 점이다.
베이둥의 대취발형기(帶嘴鉢形器·주둥이 달린 그릇)와 산좐쯔의 일부 청동기가 그렇고, 샤오좐쯔의 반형정(盤形鼎·쟁반 형태의 솥), 관이호(貫耳壺·귀달린 항아리), 압형기(鴨形器·오리 형태의 그릇) 등이 그렇다.
즉, 신주모시듯 제사용 청동예기를 가져온 은 유민들이 현지 토착문화의 형태로 청동기를 제작, 고향 사람들과 ‘알콩달콩’ 살았다는 뜻이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고죽국과 고조선의 관계이다. ‘사기’ 백이열전은 고죽국이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운 성탕 때 상의 제후국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상한 대목이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武王及封箕子於朝鮮)”는 ‘사기’ 송미자세가의 기사이다. 이는 “무왕이 (이미 존재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기자를 봉했다”고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명나라 사람 함허자(涵虛子)가 주사(周史·주나라 역사)를 인용한 “기자가 중국인 5000명을 이끌고 조선 땅에 들어갔다(入朝鮮)”는 기사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주나라 무왕 때, 즉 BC 1046년 이전부터 이미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 고죽국은 (고)조선의 영역 우리는 이미 BC 6000년부터(차하이·싱룽와 문화) 발해 연안 북부, 즉 다링허 유역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중심으로 한 발해문명의 맹아가 싹텄음을 보았다. 그 문화는 단·묘·총으로 대표되는 제정일치 시대를 개막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 그리고 대규모 석성과 적석총을 특징으로 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로 이어졌음을 논증해왔다. 이것은 전형적인 동이의 문명이다.
그리고 그 발해문명의 창조자 가운데 일파가 중원으로 내려와 한족인 하나라를 꺾고 은(상)나라를 세웠다.(BC 1600년) 그런 뒤 다시 한족의 주나라에 나라를 잃은 기자가 조상 땅인 발해 연안으로 돌아간 것이다.(BC 1046년)
그렇다면 조선과 고죽국은? 기자(記者)는 일단 (고)조선과 은(상), 고죽국이 모두 동이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싶다. 이형구 교수는 ‘고죽국은 물론 (고)조선의 영역이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한다.
“고죽국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옮겨간 것이 아닐까. 원래는 옌산산맥 남록, 즉 만리장성 밑(롼허 하류 누룽셴·盧龍懸)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마도 백이·숙제가 굶어죽었다는 수양산도 옌산의 일부였을 것이고….”
이 고죽국이 BC 1600년 무렵 중원에서 은(상)을 건국한 성탕이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바로 그 고죽국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무슨 변고가 생겨 옌산을 넘어 카줘 일대로 둥지를 옮긴 것이 아닐까. 같은 동이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영역으로….
물론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고죽국이 카줘 일대로 옮겨간 것일 수도 있다. 고조선 문화인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부터 시작. 하한은 늦게 잡으면 BC 1300년 무렵)와 기자족의 이동에 따라 은말 주초의 청동기가 성행하는 BC 11세기와는 약 100~200년의 공백기가 있다. 이 때가 바로 고조선의 세력이 약화된 시기가 아닐까.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ㆍ기자조선, 中 제후국 아닌 동이족 독립국 BC 1046년. 주나라 무왕이 은(상)의 주왕(紂王)을 죽이고 은(상)의 554년 역사를 종식시켰다.
이것은 동북아 고대사의 판도를 뒤바꾼 대사건이었다. 한족(漢族)의 하(夏·BC 2070~BC 1600년)를 무찌르고 동아시아의 주인공이 된 동이족의 천하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한족(하)~동이족(은상)~한족(주)으로….

베이둥 방정(사각 솥) 속 바닥에는 ‘기후(箕侯)’ 명문
그 과정은 너무도 드라마틱하다. 주 무왕은 주나라의 수도인 펑이(풍읍·豊邑, 산시성 치산·岐山 부근)에서 전차 300대와 용·갑사 4만5300명을 직접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자 주왕의 학정에 못이긴 은(상)의 제후들도 전차 4000여대를 지원했다. 은 주왕은 70만 대군을 동원, 그 유명한 무야(목야·牧野, 허난성 지셴·汲縣 부근)에서 대치한다. 하지만 전쟁은 너무도 싱겁게 끝난다. 은 주왕의 학정에 몸서리를 친 은나라 군사들이 주 무왕의 군사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은나라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쥔 채(倒兵·자기 쪽을 향해 공격한다는 의미) 배반한 것이다. 결국 은 주왕은 분신 자살했고, 그의 애첩 달기는 목을 맸다. ‘사기’ 주본기는 “은(상)나라 사람들이 모두 교외에서 무왕을 기다렸고, 두 번 절을 하며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고 썼다.
‘사기’는 은 주왕의 폭정에 시달린 은나라 사람들이 주 무왕의 정벌을 반겼다는 투로 썼다.
■ 굴복하지 않은 기자(箕子)
과연 그랬을까. ‘사기’를 꼼꼼히 살펴보면 은 백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 무왕은 은나라 사람들을 달래려 몇가지 위무 정책을 단행한다. 은(상)의 3인(仁) 중 한 사람인 기자(箕子)를 석방시키고, 은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제후(諸侯)로 봉하면서 은나라 유민(은유·殷遺)들을 다스리라고 명했다. 은나라 역법(曆法)까지 그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특전까지 베푼다. 역법은 정권의 상징. 그런데 은의 역법까지 쓰라고 했으니 얼마나 은나라 백성들의 눈치를 본 것인가.
그러면서도 2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왕의 친동생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무경의 사부로 임명, 감시토록 한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도) 무경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음험한 마음을 품을까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케 하였다.”(사기 위강숙세가)

옆면에는 24자의 명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무 왕의 불안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무왕의 행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은나라 유민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기자(箕子)를 몸소 찾아가 천하의 상도(常道)를 묻고 유명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가르침을 받는다. 하지만 이종족(異種族)인 은나라 백성들의 민심을 잡는 것이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우선 기자를 조선에 봉했지만(武王乃封箕子於朝鮮), 그를 신하로 여기지 않았을 만큼(而不臣也) 경외했다. 이것은 해석에 따라 기자가 무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다(不臣)는 뜻으로도 된다. 여하간에 기자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기자가 폐허로 변해버린 인쉬(은허·殷墟)를 지나다가 맥수지가(麥秀之歌)를 짓자, 그 노래를 들은 은나라 유민들이 구슬피 울었다는 대목(사기 송미자세가)이 있다. 은나라 백성들의 민심이 어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다(以暴易暴兮)”는 백이·숙제의 비난이 당대 여론의 주류였을 것이다.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스트레스가 컸을까. 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지 3년 만인 BC 1043년 병으로 죽고 만다. 나이 어린 왕(성왕·成王)이 등극하자 무왕의 동생(성왕의 삼촌)인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에 들어간다.
■ 끝까지 저항한 망국의 은(상) 백성
이때 문제가 생긴다. 은나라 제사를 이은 무경(은 주왕의 아들)과, 무경의 감시자였던 관숙과 채숙(둘 다 역시 무왕의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성왕을 대신해 섭정에 나선 주공이 권력을 찬탈할까 의심했던 것이다. 셋은 의기투합했고, 망국의 한을 품은 은나라 사람들이 반란군 세력으로 나섰다. 동이족 계열인 회이(淮夷·산둥 남부 지역의 동이족) 사람들이었다.

24자 명문은 “정해(丁亥)일에 ‘회’가 ‘목’이라고 하는 곳에서 右正이란 관직을 가진 ‘문’에게 관패(串貝) 한 조와 붕패(朋貝) 200개를 상으로 내렸다. 이에 ‘문’이 ‘회’에게서 받은 상사(賞賜)를 칭송하기 위해 어머니 모기(母己)의 제사를 지낼 제기(사 격형 큰 솥·方鼎)를 만들어 기념한다”고 해독할 수 있다. 바닥의‘기후’명문과 함께 해석하면 ‘회’라는 인물은 기후, 즉 기자족의 일원임을 알 수 있다. ‘箕侯亞 ’ 명문 가운데는 시호를 뜻하는 상형문자로 보인다. 명문중 ‘기후’를 둘러싼 글자는 亞로 해석되는데,‘기후’라는 작위를 내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孤竹)’명 청동기는 백이·숙제의 고죽국을 알려주는 고고학 자료이다. | 이형구 교수 해석
하지만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은나라 백성을 이끈 무경과 관숙은 주살되었다. 은 유민의 저항에 놀란 주 성왕은 은나라 세력을 둘로 쪼개 약화시켰다. 은말의 3인(仁)이었던 미자(微子)를 망한 은(상) 왕조의 후사로 삼았으니, 그것이 바로 송(宋)나라다. 또 주 무왕의 다른 동생인 강숙(康叔)을 봉해 은유(殷遺)들을 맡겼다. 강숙과 은 유민은 인쉬(은허)에 거주했는데, 이것이 위(衛)나라다.
“은나라의 저항이 끈질겼어요. 성왕 때까지도 왕이 과거 은나라의 세력과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은을 멸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이형구 선문대 교수)
사기 주본기에 “성왕이 은의 잔여 세력을 소멸시킨 뒤에야 비로소 예의와 음악이 바로 잡히고 흥성해졌다”고 했으며, 그 뒤에도 “동이를 정벌하고…”하는 대목이 이어지는 걸 보면 은과 동이의 저항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기자조선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왕에게 ‘홍범구주’의 가르침을 준 기자는 어디로 떠났을까. 사기는 분명히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무왕이 기자를 (존경한 나머지) 신하로 부르지 않았든지, 아니면 신하이기를 거부했든지 어쨌거나 기자는 무왕의 품을 떠났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기자는 과연 주나라의 제후국이었을까. 이형구 교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주나라의 제후국 이름을 보면 한결같이 진·한·위·노·제·송·채 같은 단명(單名)이잖아요. 그런데 조선(朝鮮)은 복명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자기 영역 밖의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복명을 썼거든. 조선, 선우, 중산, 흉노, 선비, 오환처럼…. 그러니까 주나라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외국으로 친 겁니다.”
그러고보니 사마천의 ‘사기’는 기자와 관련된 기록을 ‘기자세가’가 아니라 ‘송미자세가’에 아주 자세하게 담았다. 만약 기자조선을 중국의 역사로 쳤다면 ‘기자세가(箕子世家)’라 해서 별도의 꼭지로 처리했을 것이다.
공자는 그렇다치고, 실패한 반란의 주인공인 진섭(陳涉·반란을 일으켜 秦나라를 무너뜨린 인물)마저 세가(제후국의 흥망성쇠를 담은 것)에 담은 사마천이지 않는가.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무장한 사마천이라면 홍범구주로 무왕을 가르쳐 결과적으로 주나라 건국정신의 토대를 쌓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역사를 당연히 세가에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이 아니기에 차마 세가에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기자가 가공 인물이며,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가 거짓이라는 해석이 팽배한데요. 기자가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해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 그런 측면도 있고, ‘기자조선 인정 = 소중화 = 사대주의’라는 조선시대 이래의 역사 인식에 대한 거부감도 있고…. 또한 중국과 우리의 역사를 떼어놓으려는 일제 관학자들의 그림자도 아직 남아 있고….”
그런데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기자를 거부하려는 시각이 있다면, 기자의 신분이 종족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 기자에 대한 ‘사기’의 기록은 과연 거짓인가.
“이미 기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노나라 태사 좌구명이 쓴 역사책) 희공 15년조(645년)에 출현합니다. 또하나 사기의 정확성은 정평이 나있잖아요.”
‘있는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는 많지만, ‘없는 역사’를 있다고 하는 법은 드물다. 더욱이 1899년부터 확인된 은(상)시대의 갑골문을 해독한 결과 사기 은본기에 나온 은(상)나라 왕의 이름들과 거의 일치한다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BC 90년 무렵 완성된 사기가 진짜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사기’ 주본기, 송미자 세가와 노주공세가, 위강숙세가 등에 나타난 기자의 기록은 사실로 봐야 할 것 같다.
■ 가자! 본향으로

자, 이젠 기자의 행방을 쫓아가자. ‘기자조선의 존재’를 논증한 이형구 교수가 주목한 곳이 바로 카줘셴(喀左縣) 베이둥(北洞) 유적이었다. “기후(箕侯)와 고죽(孤竹)명 청동기가 나온 두 곳의 유적 거리가 불과 3.5라는 점이 눈에 띄었어요. 기자조선의 대동강 유역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중국학계는 ‘기후’명을 기자로 해석하지 않았거든. 나는 거의 붙어있는 두 유적의 관계를 흥미롭게 여겼는데, 바로 두 제후국이 시간 차를 두고 계승한 것으로 보았어요.”
은말주초(殷末周初)의 명문 청동기는 비단 베이둥에서만 발견된 게 아니다. 카줘셴 산완쯔(山灣子)·샤오좐쯔(小轉子)·샤오보타이거우(小波汰溝)와 이셴(義縣) 사오후잉쯔(稍戶營子) 교장갱 등에서도 나왔다.
그런데 베이둥에서 나온 청동기의 ‘기후’와 ‘고죽’ 명문 외에도 산완쯔·샤오좐쯔·샤오보타이거우 등에서는 숙윤(叔尹), 술(戌), 백구(伯矩), 어(魚), 주(舟), 차(車), 사(史), 아(亞), 윤(尹), 채(蔡), 사벌(史伐), 과(戈) 등 여러 씨족들의 징표가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은(상)이 망한 뒤 기자가 주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여러 씨족들을 이끌고 동북으로, 동북으로 향했다고 보면…. 그리고 머나먼 조상 때부터(훙산문화 시절부터) 하늘신과 조상신 제사를 끔찍이도 모셨던 그들은 신주 모시듯 했던 청동예기(방정·뢰 등)들을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옛 고향으로 떠났다고….”(이형구 교수)
이와 관련, 1930년대 인쉬 발굴을 총지휘한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의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은상의 선조가 동북에서 황허 하류로 와서 나라를 건국하고, 은이 망하자 기자(箕子)가 동북(고향)으로 돌아갔다.”(동북사강·東北史綱)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왕궈웨이(王國維)도 “은이 망한 뒤 기자는 선조의 땅으로 돌아갔다(從先王居)”고 했다. 명나라 사람인 함허자(涵虛子)는 ‘주사(周史)’를 인용하면서 “기자는 중국인(즉 은나라 유민) 50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또 하나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을 보면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자가 망국의 눈물을 흩뿌리며 은(상)의 백성들과 함께 험난한 옌산(燕山)을 넘어 도착한 곳이 그들의 본향인 고죽국, 바로 조선 땅이란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ㆍ공자·기자·백이·숙제 모두 동이족의 후예 이젠 미스터리의 세계다.
29년 전 폭풍을 일으켰던, 그렇지만 지금도 미해결로 남아있는 고대사, 즉 기자와 기자조선, 고죽국, 그리고 고조선의 세계로 빠져들자.

랴 오닝성 카줘 베이둥에서 확인된 방정(方鼎·사각형 솥). 이 방정의 바닥에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기자와 기자조선의 흔적을 짐작할 수 명문이다. 지금 선양 랴오닝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선양 | 김문석기자>
1973년 랴오닝(遼寧)성 카줘(喀左)현 베이둥(北洞) 구산(孤山)에서 확인된 ‘기후(箕侯)’명, ‘고죽(孤竹)’명 청동기부터 이야기 하련다.
“임시로 집어넣은 교장갱에서 발견된 청동기들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두 곳 다 청동기 6점이 질서정연한 세트를 이루고 있잖아요. 또 발견 지점이 다링허(大凌河)와 그 지류가 서로 만나는 지점의 구릉 위였어요. 이것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이형구 교수)
그것은 이 교장갱이 모종의 특수 목적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지배층이 하늘신 혹은 조상신에게 제사 같은 의례를 행하고 매장한 예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천도시야비야
제사? 제사라면 바로 동이족의 유별난 풍습이다. 적어도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 때부터 제정일치 사회를 열었던 발해문명의 창조자들. “동이족(東夷族)은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후한서 동이열전)”가 아니었던가.
더욱 흥미로운 대목이 있으니 바로 은(상)의 왕족인 기자(箕子)와 고죽국의 왕족인 백이(伯夷)·숙제(叔齊)이다. 이 세 사람은 공자에 버금가는 군자이다. 공자·기자·백이·숙제 모두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인 동이의 후예들이라는 게 재미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다. 왕위를 서로 양보한 두 형제는 북해지빈(北海之濱), 즉 지금의 발해연안을 떠돌았다. 그러다 주나라 문왕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주나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문왕은 죽은 뒤였다. 뒤를 이은 무왕은 은(상)의 주왕 정벌에 나설 참이었다. 백이·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했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니 어찌 효(孝)라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려 하다니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습니까.”
백이·숙제는 끝내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먹고 살다가 굶어죽었다. 그들이 남긴 채미가(采薇歌)는 지금도 회자된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으니(以暴易暴兮), 그 잘못을 모르는 구나(不知其非矣)~.”
사마천은 ‘백이열전’을 쓰면서 백이·숙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부짖었다.
“천도(天道)는 늘 착한 이만 돕는다고 했다. 그런데 도척 (盜蹠·춘추시대 때 횡행한 큰 도적) 같은 자는 천수를 누리고 백이 · 숙제는 굶어 죽었다. 근자에도 나쁜 짓만 하면서도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는 이들이 있는데, 과연 천도란 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天道是耶非耶)?”
이 사마천의 한탄이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으니, 기자(記者)도 사마천처럼 감히 외치고 싶다. 과연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 동이족이 낳은 군자(君子)들
또 한 사람 동이가 낳은 군자가 있었으니 바로 기자(箕子)이다. 공자는 일찍이 “은에는 미자(微子)와 기자, 비간(比干) 등 3인(仁)이 있었다”고 했다. (사기 송미자세가) 3인 모두 은(상) 마지막 왕 주(紂)왕의 친척이다.
기자는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장탄식 했다. 기자의 한탄.
“상아 젓가락을 쓴다면 조금 뒤엔 옥잔을 쓸 거고, 더 조금 뒤엔 수레와 말, 궁실의 사치로움이 도를 넘을 것이다.”
간언이 통하지 않자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했다. 그러다 주왕에게 들켜 노예가 되었다. 풀려난 뒤에는 슬픔에 잠겨 거문고를 두드리며 세월을 보냈다. 참담했던 시절 거문고를 타며 시름을 달랬던 것은 훗날 공자도 마찬가지였으니, 역시 동이의 핏줄은 통하는 것일까.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지 2년 뒤 기자를 찾았다. 망한 은나라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인 기자를 포섭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은나라가 망한 까닭이 무엇입니까.”(무왕)
그러나 기자는 차마 주왕의 죄악을 고하지 못한 채 국가 존망의 도리만을 이야기했다. 머쓱해진 무왕도 화제를 바꾸어 천도(天道)에 대해 물었다. 이 때 기자가 전한 가르침이 그 유명한 ‘홍범구주(洪範九疇·백성을 안정시키는 하늘의 큰 법칙 9가지)’이다.
기자는 “정치란 하늘의 상도(常道)인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 등 구주(九疇)에 의해 인식되고 실현된다”(기자·사기 송미자세가 참조)고 설파했다.
“국가에 도움 되지 않은 자에게 작록을 하사하면 왕의 행위를 죄악으로 몰고 갑니다. 사적인 것에 치우치지 마세요. 그래야 성왕의 길이 넓어집니다. 간사한 것으로도 기울지 마세요. 그래야 성왕의 길은 정직해집니다.”(홍범구주 가운데 ‘황극’ 부분)
한수 지도 받은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그러나 그를 신하의 신분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록은 2000여 년 뒤인 지금에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대목이다.
■ 비운의 기자(箕子)

망국의 한을 품고 눈물을 삼킨 기자(箕子). 그는 민족적·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시대마다 상반된 평가를 받아가며 역사적인 유랑을 이어가는 딱한 처지에 놓였다.

우선 “무왕이 기자를 조선 땅에 봉했지만, 그를 신하로 대하지는 않았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는 사기 송미자세가의 내용을 보자. 하지만 ‘而不臣也’라는 대목은 “기자가 조선땅에 봉해졌지만 신하 되기를 거부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전자의 해석이라면 무왕이 기자를 조선땅에 봉했지만, 신하로 여기지 않을 만큼 존경했거나 아니면 조선을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후자의 해석이라면 봉했지만, 기자가 주나라 제후국임을 거부하고, 독립된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된다.
이 문제는 나중에 거론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일단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 즉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해 풀어보자.
기자는 무왕을 만난 뒤 과연 어디로 갔을까. 중국학계는 기자가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둥지를 틀었으며, 그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라 했다. 이것은 중국학계의 흔들림 없는 정설이었다. 우리 학계는 어땠을까. 구당서 동이전 고려(고구려)조는 “음식을 먹을 때~ 기자(箕子)의 유풍이 남아있다. ‘기자신(箕子神)’을 모신다”는 내용이 보인다.
“제왕운기는 전기조선-후기조선-위만조선기로 인식했는데, 전기조선의 시작은 단군, 후기조선의 시작은 기자로 보았지요. 단군-기자-위만조선이란 인식체계는 제왕운기에서 비롯됐어요.”(이형구 교수)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강했던 조선에서는 기자는 고조선의 시조로 추앙되기도 했다. 기자가 정치적인 사대(事大)의 대상으로 이용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 침략기에 들자 양상이 180도 바뀐다. 대대적인 ‘고조선사’ 말살작전에 나선 것이다. 시라도리 구라기치(白鳥庫吉)는 1894년 ‘단군고’를 펴내면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스러운 선담(仙譚)을 만든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그뿐이 아니었지. 시라도리는 1910년 ‘기자는 조선의 시조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기자 기록도 조작됐다고 했어요.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또 어떻고. 1922년 ‘기자조선전설고’에서 ‘조선에 전해지는 기자전설은 연구의 가치가 조금도 없는 전설’이라 주장했고, 29년 발표한 ‘단군고’에서는 ‘중국과 조선민족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목청을 높였지.”
일제는 왜 ‘모화사상(慕華思想) 타파’의 기치를 올려 고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리 민족과 기자의 관련성을 극력 부정했을까.
조선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기자(記者)는 이 대목에서 2003년에 읽었던 책(‘부끄러운 문화답사기’·다큐인포)의 구절이 떠오른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독립문의 ‘독립’은 실은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 것일 뿐이다. 독립협회를 장악했던 이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이완용·윤치호(모두 협회 회장을 역임) 등 친일파가 대부분이었다.”
대륙 침략을 앞둔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조동조론(日朝同祖論)을 펴기 위해 조선과 중국을 분리시키기 위해 ‘모화사상 배격’ 운운하며 고조선과 기자를 한꺼번에 뭉갠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은 그 나름대로 민족사의 유구함과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독립투쟁의 수단으로 단군을 부각시켰다.
“물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조선 분립의 시대’(조선상고사)를 기술하면서 삼조선 중 ‘불朝鮮’의 시조를 기자라 했어요. 기자의 동래설(東來說)을 인정한 거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민족주의 학자들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한 기자의 존재를 부정했어요.”
■ 터부시된 기자·기자조선
해방 후에는 더욱 얽히고 설켰다.

‘기후(箕侯)’명 방정과 ‘고죽(孤竹)’명 청동 술그릇이 출토된 베이둥 유적.
“뿌 리깊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단군과 단군조선은 신화로 변질되었어요. 고조선의 국가적 성격과 사회·경제적인 측면은 연구 대상에서 빠졌고…. 더불어 기자와 기자조선은 완전히 부정되었지. 한반도 대동강까지 중국인(기자)이 와서 나라(기자조선)를 세웠다는 것을 인정할 리 만무했어요.” 결국 식민사관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단군은 신화로 변질되고, 기자는 역시 식민사관과 해방 후 정권 이데올로기 홍보차원에서 강조된 지나친 민족 주체성 때문에 허구의 인물로 치부된 것이다.
물론 은(상)나라를 동이의 문화로 봐야 한다고 일찍이 설파한 정인보·홍이섭 선생 같은 이와, 기자동래설을 인정한 단재 선생 같은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웬만한 내공을 갖추지 않고서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운위한다는 자체가 터부시되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만한 학문(자료)과 기개를 갖춘 이가 없었다. 그러던 1979년 이형구 교수의 석사논문이 소개된 것이다.
이 논문이 폭풍을 일으킨 이유는 두가지였다. 발해연안에서 쏟아진 은말 주초 청동기들을 토대로 기자조선의 실체를 논증했다는 점이 하나고, 두번째는 기자조선이 그동안 알려진 대동강이 아니라 발해연안 북쪽에 둥지를 틀었다는 점이었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후원 | 대순진리회>
ㆍ고대사 뒤흔든기자조선은 실존했었다
문 화대혁명이 대륙을 강타하고 있던 1973 3. 분서갱유처럼 역사와 학문이 산산이 파괴되던 그 잔인했던 대륙의 동북쪽이었다. 한 농부가 랴오닝(遼寧)성 카줘(喀左)현 성 소재지인 다청쯔(大城子)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 남안의 작은 구릉, 즉 구산(孤山) 베이둥(北洞)을 찾았다. 채석작업을 벌이던 농부는 깜짝 놀랐다.
표면에서 불과 30㎝ 밑에서 모두 6점의 은()나라 시대 청동기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청동 항아리 1점과, 청동제 술그릇() 5점이었는데, 모두 주둥이가 위를 향해 있었다. 희한했다. 2호 청동 술그릇의 주둥이 안에 이상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고죽, 기후 명 청동기

6자였다.
그 런데 6자 가운데 3, 4번째 글자인고죽두 자는 1122년 송나라 휘종이 출간한박고도록(博古圖錄)’상하이 박물관 소장 청동기 부록(1964)’에 수록된 은() 청동기 명문 중에서도 나온 바로 그 글자였다. 바로 고죽(孤竹)이란 글자였다. 항아리의 무늬와 형태는 갑골이 쏟아진 안양 인쉬(殷墟) 유적에서 나온 은() 나라 말기의 청동 술그릇과 같았다.
같 은 해 5, 이 교장갱(교藏坑·물건을 임시로 묻어둔 구덩이)을 정리하던 조사단은 불과 3.5 옆에서 또하나의 구덩이를 확인했다. 지표 밑 50㎝에서 은말주초 청동기 6점을 발견한 것이다. 청동기 6점은 장방형의 교장갱 안에 세 줄로 배열됐다. (), 술그릇(), 물 따르는 그릇(帶嘴鉢形器) 등이 하나의 세트로 일정한 규율을 갖추고 있었다.
2호 교장갱 출토품 가운데는 방정(方鼎·사각형 솥)이 가장 주목을 끌었어요. 높이 52, 입지름 30.6×40.7, 다리 높이 19.6, 무게 31㎏였는데 굉장히 아름답고 전형적인 은()나라 말기의 방정이었지.”(이형구 교수)
방정의 형태와 무늬는 역시 인쉬 부호(婦好)묘와 인쉬 허우자좡(侯家莊) 대묘에서 출토된 대형 청동솥과 같았다. ()나라 말기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정의 북쪽 내벽에 4 24자의 명문이, 바닥 중심에도 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문제의 명문은 내부 바닥 것인데, ‘(箕侯)’로 읽을 수 있는 명문이었다. 보고자들은 명문에서 보이는고죽기후를 은나라 북방에 자리잡은 2개의 상린제후국(相隣諸侯國·인접해 있던 제후국)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중국학계는고죽명은 문자 그대로 고죽국으로 보았으나, ‘기후(箕侯)’명 청동기를기자(箕子)’와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학계 주류는 기자가 한반도 대동강까지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강타한기자조선의 부활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79년 새해 벽두. 깜짝 놀랄 소식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箕 子朝鮮은 실존했었다”(경향신문 1979 15일자)는 보도 때문이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한··일 학계가 뜨거운 감자로 여긴 기자조선의 실체를 고증한 이형구 당시 문화재전문위원(현 선문대 교수)의 논문을 실었다. 논문은 이형구 교수의 국립 대만대 고고학과 석사학위 논문중국동북부 신석기 시대 및 청동기시대의 문화 연구였다.
34살 고고학도가 쓴 한 편의석사논문은 학계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이른바물 먹은다른 언론은 다음날 경향신문·서울신문의 기사를 받아 쓸 수밖에 없었다. 경향신문은 사설(19)을 통해민족사의 재조명-식민사관 극복위한 일대전기를 갖자고 기원했다.
다른 신문들도 사설에서기자조선이 뜻하는 것-적극적인 자세로 史實을 밝히자’(한국일보 7일자), ‘상고사연구와 국제협력’(동아일보 8), ‘기자조선의 허실-이를 밝히는 학술작업’(조선일보 10일자)이라며 연일 다투어 촉구했다.
학 계논쟁은 한국을 대표하는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대리전으로 번졌다. 74년 이미기자고(箕子攷)’라는 논문에서 기자의 한반도 전래설을 주장해온 사학자 천관우씨는우리 상고사의 큰 문제점의 하나에 명쾌한 조명을 던진 연구라고 평가했다. 손보기 연세대 교수는위당(爲堂), 홍이섭 등 민족사학자들은 이미 은()을 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문화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김원룡 서울대 교수도기자조선의 기()씨가 가공인물이 아니라 실존했음이 확실해졌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철준 서울대 교수는 “‘기후(箕侯)’라는 명문을 새긴 방정(方鼎)이 출토되면서 기자조선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김정배 고려대 교수와 김정학씨는중공자료에 집착한 인상”(김정배 교수·중앙일보 320일자) “랴오닝 지방 청동기는 은·주가 아니라 시베리아 계통”(김정학씨·중앙일보 117일자)이라고 반박했다. 이기백 서강대 교수는 이형구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기후(箕侯)가 기자조선이었다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학문엔절대란 없다
논 쟁은 해외까지 번졌다. 당시 심심치 않게 국내에 인용되던 통일일보(일본에서 한국인이 발행한 일본어신문)는 천관우씨와 김정배씨의 글을 상··하로 다뤘다. 또한 대만의연합보한국인 학자가 뿌리를 찾는다(韓國學人在尋’-李亨求爲箕子朝鮮正名)”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자조선의대동강 유역 존재설을 흔들림 없이 믿고 있던 중국문화대 량자빈(梁嘉彬) 교수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이교수의 논문을 급히 입수한 뒤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그야말로 동북아 학계가 요동친 것이다.
논문 을 지도·심사한 베이징대 출신 원로 고고학자 가오취쉰(高去尋) 교수와 인쉬(은허·殷墟)를 발굴했던 스장루(石璋如) 선생 등이 78년말 기립박수로 통과시킨 논문이었지. 그런데 이 논문을 국내에 소개했을 때, 어느 정도 파장은 예상했지만 사태가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줄은 몰랐지. 아 글쎄 내 논문을 가지고, 당대최고의 학자들이 그분들끼리 치열한 논쟁을 벌이잖아요. 그때, 정신차려야겠구나. 더 공부하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구나하고 느꼈지.”(이형구 교수)
이 논쟁과 관련된 자료를 들추던 기자(記者)는 학문에서 ‘(상대방의 견해는) 절대 아니다’, ‘내 주장은 100% 옳다는 쾌도난마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특히나 고고학·문헌 증거들이 속출하는 역사 및 고고학계에서 과거의 학설이나 주장은 언제든 바뀔 운명에 놓여있다. 그런데도내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새로운 성과나 연구결과가 나왔을 때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아설 명분, 즉 자신의 고집을 번복하고 새로운 학문을 향해 진일보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것이다.
조유전 현 토지박물관장이 늘 드는 재미있는 일화 하나.
질서정연하게 세트를 이룬 채 발견된 은()나라 말기 청동기. 1973년 한 농부가 랴오닝성 카줘현 베이둥에서 땅을 파다가 확인했다.
국 립문화재연구소장에 있을 때였어요. 백제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어느 기자가 그래요. ‘소장님, 봤습니까. 그 때(백제시대) 소장님이 살아봤어요?’ 허허. 물론 농담이었는데 그 말이 맞더군요. (당시를) 살아보지 않고 쾌도난마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29년 전을 뜨겁게 달궜던기자조선논쟁도 그렇다. 반발이 워낙 극심했던 탓에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극렬하게 반발했던 측이 그 이유로 내세웠던 일부 주장들은 중간에 사실상 폐기되었다.
우리 민족문화의 시베리아 기원론이 대표적이죠. 1980년대까지 풍미했던 우리 민족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이 90년대 들어 수정되었습니다. 시베리아 기원설이 국사교과서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거지요. 국립중앙박물관의 도록도 2003년판과 2005년판이 다른데, 주된 변화는 우리 신석기·청동기 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이 아무 설명도 없이 빠진 겁니다.”
1980 년대 이후 발해연안에서 BC 6000년전 문화인 차하이-싱룽와 문화를 비롯, 훙산문화(BC 4500~BC 3000), 샤자뎬하층문화(BC2000~BC 1400) 등 동이족이 창조한 발해문명의 흔적들이 대거 쏟아진 것이다.
발해연 안 빗살무늬 토기문화와 청동기 문화 등의 연대가 시베리아의 그것보다 훨씬 이르다는 증거들이 잇달아 발견되자 시베리아 기원설이 힘을 잃어간 것이지. 내가 그걸 논증하느라 30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바로 잡은 것인데, 아무 설명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그냥 넘어가면 안되지….”(이형구 교수)
한국 고대사의 뇌관
여기서 이기백 선생이 기자조선 논쟁이 한창일 때 이형구 선생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에 주목한다. 이기백 선생은 물론 젊은 고고학자인 이형구 선생의 견해를 비판한 쪽이었다. 이기백 선생은 편지에서이형구씨가 고죽(孤竹)과 고조선을 연결시킨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조목조목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말미에 “(이형구씨의 논문 발표로) 학문적인 바탕 위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제시된 만큼 장차 활발한 토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비판은 했지만 학술토론의 여지를 남긴 것이다. 고고학계의 태두 삼불 김원룡 선생도 원래 한국민족 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삼불은 이형구 교수의 논문을 폄훼하는 대신랴오닝성은 한()족과 우리 민족의 접경지역이며~ 우리도 중공학계의 정보입수와 함께 중국·일본고고학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역시 심도있는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학계의 어른들은 학문이 살아있는 생명체인 만큼 언제든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 것이다. ‘기자조선 논쟁의 불을 붙인 당시 박석흥 경향신문 기자의 개탄(79 115일자)은 생생하다.
한 국학계에 큰 충격을 준 기자(箕子) 명 방정(方鼎·사각형태의 솥)은 이미 73년에 발굴되었고, 76년에 일본 전시회 때 실물이 공개됐다. 그런데도 우리 학계가 뒤늦게 입수해 검토하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결정적인 유물 발굴에도 근본적인 변화없이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학계풍토이다.”
아마도 박사논문도 아닌 석사논문이 이렇게 파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기자(箕子)와 기자조선 문제는 동북아 고대사에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뇌관이었다. 그런데 젊은 고고학도가 그 뇌관을 건드렸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 그런 그를 기성학계가 그냥 놓아두지 않았던 것이다. 학계는 왜 기자조선 문제가 나왔을 때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을까. 그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보자.
<후원:대순진리회>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ㆍ‘갑골문화’ 동이족이 창조 한자는 발해 문자 였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빛바랜 논문 한 편을 꺼냈다. 1981년 국립 대만대 유학 시절 작성한 중국어 논문(‘渤海沿岸 早期無字卜骨之硏究’)이었다. 그는 논문 뒤편에 쓴 후기(後記)를 보여주며 추억에 잠겼다.
“여기 후기에 ‘내가 병중에 초고를 완성했다(病中完成草稿)’고 했어요.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 대장암 진단을 받았거든. 의사가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기 전에 이 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 수술 날짜도 받지 않고 한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신들린 듯 논문을 완성했지. 그리곤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달려가 재진찰을 받았는데, 아 글쎄 오진이라잖아요.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갑골문화는 동이의 지표


안양 샤오툰춘에서 나온 갑골과 갑골문자. 갑골문화는 발해문명권의 독특한 문화였다.
27 년 전에 쓴 사연 많은 논문은 갑골문화와 우리나라 갑골문화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논문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발행하는 ‘고궁계간’(81~82년)에 3회 연재되었다.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격인 대만 국립편역관이 펴낸 갑골학의 교과서인 ‘갑골문과 갑골학’(張秉權·장빙취엔)도 이 교수의 논문을 갑골의 기원을 가장 잘 논증한 논문으로 평가했다.
“그때까지 갑골문화라 함은 은(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겼거든. 내 은사이자 안양 인쉬(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스장루(石璋如)·리지(李濟) 선생은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 선생 등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달랐다. 유학 초기부터 발해문명에 깊이 연구해왔던 이 교수가 아니던가.
“갑골문화의 분포지를 유심히 살피니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더군요.”
이 교수의 말마따나 “갑골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한국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은말(제을~주왕·BC 1101~BC 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貞자를 잘 뜯어봐요.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 目자, 맨 밑에 사람 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은(상)의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 때의 갑골을 보자.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 아닌가. “오로지 은(殷)의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이 있다”는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은 옳은 기록이다.
점복의 나라, 예법·효의 나라
이렇게 은(상) 사람들은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은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라 보면 됩니다.”(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자.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길)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다.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두터이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했다.”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월식사실이 기록된 은(상) 무정(BC 1250~BC 1192년)시기의 갑골내용. 점을 친 정인의 이름과 점복내용, 실제 일어난 일 들이 기록됐다. |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에서
“한 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이형구 교수 ‘문헌자료상으로 본 우리나라 갑골문화’ 논문 중에서)
그럴듯한 해석이다. 점복신앙의 단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시조설화에서도 엿보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유명한 내용인데,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만 있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소용인가. 고고학 자료를 보자.
갑골의 원류는 발해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거지. 또 하나 발해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가 81년 처음 논문을 쓸 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갑골문화와 한반도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발해문명문화권인데….”
그런데 ‘병중 논문’의 초고를 완성, ‘고궁계간’에 송고한 뒤,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이 교수가 좋아할 대목이 이 보고서에 있어요.”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것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이교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지. 그 보고서에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복골의 존재가 있었거든.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으니….”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그렇다면 동이족이 한자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발해문명 창조자인 은(상) 시대에 갑골문자가 창조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지만 아직 연산산맥 동쪽이나 한반도에서는 문자가 있는 갑골이 나오지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죠. 발해문명 창조자들인 동이족이 남으로 내려가 중원문화와 어울려 함께 한자를 창조했다고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후원 : 대순진리회>
<뉴허량·선양 |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ㆍ은·부여는 ‘君子의 후예’ 풍류 즐기고 禮 중시
ㆍ      은(상) 마지막 왕 주(紂)의 악행에 대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충신의 심장을 갈랐고, 육포를 뜨고 젓을 담가 맛보게 했으며, 녹대(鹿台)를 만들어 세금으로 거둔 돈을 가득 채웠으니까. 폭군은 더 나아가 수많은 악공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주지육림의 난행을 펼쳤다.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것으로도 악명을 떨쳤다.(사기 ‘은본기’)


안양 인쉬 거마갱(車馬坑)에서 발굴된 마차유적. 은(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주(紂)왕을 위한 변명-
주왕의 악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지만 “악공과 광대를 불러놓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일”에 대해서는 다소간 할 말이 있다. 바로 음주가무야말로 상나라 풍습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는 부여 풍습이 대표적이다. 마한도 그랬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
이는 왜 현재 우리나라 전국에 4만여곳의 노래방이 성업 중인지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것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보듯 우리 민족은 무절제한 음주가무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며칠씩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것은 천·지·인이 만나 한바탕 신명을 떨친 축제였다.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만물의 소생을 기원하고 추수감사를 드리는 전통축제였던 셈이다. 조흥윤 한양대 교수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인 것이 바로 굿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고조선 시기 순장무덤인 랴오둥반도 강상무덤.
“삼 국시대 화랑도·풍류도와 고려시대 연등회·팔관회 등은 종교행사 형식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음주가무를 포함한 옛 제천의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巫)와 불교를 억압한 조선 때 크게 위축되었지만 신명과 음주가무라는 한국인의 민중문화는 면면히 이어졌다.”(조흥윤의 ‘한국문화론’ 동문선)
그렇다면 주왕의 난행은 어찌된 것인가.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한족은 의도적으로 은나라와 주왕을 무도한 나라, 그리고 천하를 난도질한 망나니로 폄훼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족이 기록한 ‘승자의 역사’인 셈이다.
일례로 축제 때 젊은 남녀들을 ‘풀어놓아’ 짝을 짓게 만드는 풍습은 지금도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을 조사한 민족지 연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자료이다. 고대사회에서 이런 정도의 축제는 흉볼 ‘깜’도 안되는 자연스러운 풍습이다.
-동이는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
그리고 은(상)나라가 무도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탐사단이 추적해왔듯 이른바 동이족의 본향인 발해연안은 BC 6000년 전부터 문명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은 이미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 3000년) 때 하늘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지난해 7월 말 뉴허량 유적에 선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이미 이곳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의 제사유적과 뉴허량(우하량·牛河梁)의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봤잖아요. 하늘신, 지모신에게 제사지내고, 그리고 적석총에 마련된 제단에서 조상을 기린 그런 모습들을 그릴 수 있잖아요. 웅녀의 원형이 뉴허량 여신묘에 그대로 나타나잖아요. 그리고 적석총 제단은 지금으로 따지면 조상에 대한 시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봐야 합니다.”
이교수는 “발해문명 창조자의 일파가 서쪽으로 남하해서 건국한 상나라에서는 제천(祭天), 즉 하늘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祭祖)가 확립된 시기였다”고 말한다. 중국학자들도 훙산문화 시기에 벌써 신권과 왕권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본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인의 얼굴.
그런 점에서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극악무도한 나라로 폄훼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한서’ 동이열전(5세기 유송의 범엽이 저술)과 ‘설문해자’(說文解字·후한 때 허신·許愼이 펴낸 최고의 자전)를 종합해 보자.
“동방은 이(夷)이며, 이는 근본이다.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다. 천성이 유순하다.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이다. (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때문에 공자는 ‘중국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의 나라인 구이(九夷)에 거하고 싶다’(故孔子欲居九夷)고 말했다.”
‘후한서’ 동 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동이의 역사를 나열하기 전 ‘서론’ 형식으로 쓴 전언(前言)에서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

“난 은나라 사람이다.”(공자의 고백)
동이가 예(禮)의 민족임을 중국사료도 인정한 것이다. 그뿐이랴. 만고의 성인인 공자도 동이족의 후예였음을 고백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죽음을 앞둔 공자의 생생한 육성유언이었다. “주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에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공자. 하지만 그런 공자도 군자의 나라이자 불사의 나라인 동이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은나라 주왕 때 세 명의 성인이 있었다.
바로 훗날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箕子)와 송나라를 세운 미자(微子), 그리고 주왕에게 심장을 도륙당한 비간(比干) 등이다. 미자는 주왕의 서형(庶兄)이었다.
은을 멸한 주나라는 미자에게 은(상)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미자는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뜻을 알리고는 송나라를 건국했다. 그런데 공자는 바로 그 송나라 귀족의 후손이었다. 공자는 동이족의 후예답게 어릴 때부터 타고난 듯 예법을 따랐다.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인 조두(俎豆)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사기 공자세가)
‘조두’에서 조(俎)는 제사지낼 때 편육을 진설하는 도마처럼 생긴 제기이고, 두(豆)는 대나무·청동·도자기 등으로 만든 제사지낼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조두라 하면 제기를 뜻한다. 공자는 만능 뮤지션이었다. 동이의 후예다웠다.
때는 바야흐로 춘추시대 말기. 세상이 어지러워져 자신의 숭고한 뜻을 알아주지 않자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음악에 대한 공자의 철학은 심오했다.
“감정이 소리에 나타나 그 소리가 율려(律呂)를 이루면 그것을 가락이라 한다. 세상의 가락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우리 민족의 무용·문학·음악 등 예술의 바탕에 공자의 음악철학이 깔려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순장제도의 실상-


목 없는 순장자들의 유골.
중국학계는 또한 은나라의 습속인 순장(殉葬)제도를 야만성과 연결짓기도 한다. 은(상)의 말기 도읍지인 안양(安陽) 인쉬(은허·殷墟)의 제1001호 대묘에서 확인된 360명의 순인(殉人)의 예를 들면서….
중국의 황잔웨(황전악·黃展岳)는 “순장과 같은 야만적인 습속은 은나라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한 것으로 은의 동방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63~65년 랴오둥 반도 강상(崗上)·러우상(樓上)유적에서는 100여명, 수십명을 순장한 고조선시기의 순장무덤이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사람을 죽여 순장했는데 많을 때는 100여명이 된다”(삼국지 위지 동이전)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를 보면 “248년 왕이 죽자 순사하는 자가 많아 이를 금지하도록 했지만, 그래도 속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신라는 지증왕 3년, 즉 502년에 비로소 순장제도를 금지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목공이 죽었을 때 무려 177명을 순장시킨 기록도 있다. 순장은 고대사회에서 유행한 장례풍습이었다. 진시황이 죽었을 때는 1만여명을 생매장했으며, 명나라 성조가 죽자 무려 3000여명의 비빈이 순장됐다.
이형구 교수는 “순장제도는 전제적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통치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동이의 습속이 야만적이냐 아니냐는 단순논리로 순장제도를 해석하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여와 은(상)의 끈질긴 인연-
중국사서를 들춰보면 눈에 띄는 점이 나오는데, 그것은 ‘부여’를 늘 맨처음에 올려놓고는 돋보이게 기술한다는 점이다.
진서(晋書·당태종 때 지은 진왕조의 정사)를 보면 “부여 사람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절하고 사양의 예로 대하는데 중국과 같은 것이 있다(會同揖讓有似中國)”면서 중국과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오랑캐의 나라지만 조두(俎豆)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고~, 풍습이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大體中國如相彿也)”(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다. 조두는 바로 공자가 어릴 때 소꿉장난을 했던 제기가 아닌가.
물론 중국측 기록으로 따져봐도 부여가 BC 3세기쯤부터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 700년이나 이어진 강력한 왕국이었기에 비중있게 다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친연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은(상)으로부터 이어진 끈질긴 인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닐까. 부여, 즉 우리 민족과 은(상)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가 또 있으니 바로 점복신앙, 즉 갑골문화이다.
<후원 : 대순진리회>
〈 뉴허량·선양·하얼빈 | 이기환기자 〉

ㆍ상나라 귀족묘 출토 인골…한족 아닌 백의민족 모습 “(시조인) 설 현왕이 아들 소명(설로부터 2대)을 낳고 지석(砥石)에 거주했다.”(순자·성상편)
중국 문헌은 동이족인 상족(商族)이 중원으로 내려와 하나라를 멸할 때까지의 역사와 활동무대, 즉 시조 설부터 성탕의 상나라 건국(BC1600년)까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놓았다. 중국 학계는 이 문헌기록을 토대로 다각적인 분석에 들어간다.


안양 인쉬에서 발굴한 상(은)나라 무덤. 노예로 추정되는 대량의 인골이 나란히 묻혀 있다. 순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여의 습속과 같다.
옌산에서 백두산·헤이룽강까지 처음에 인용한 ‘순자 성상(荀子 成相)’편의 기록을 검토해보자.
“요(遼·랴오허를 뜻함)는 지석에서 나온다”는 내용이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편에 나온다. 이 내용을 주석한 가오유(高誘)는 “지석은 산의 이름이며 변방의 바깥에 있고, 요수(遼水·랴오허)가 그곳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했다.
즉 시조 설은 랴오허의 발원지인 지석에 살았으며, 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赤峰)시 커스커텅치(克什克藤旗) 부근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쪽바다’는 발해이다.
또한 ‘여씨춘추 유시(有始)’편에는 “하늘에는 9개의 들이 있는데, 북방을 일컬어 현천(玄天)이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진징팡(김경방·金景芳)은 이 모든 문헌을 근거로 “설, 즉 현왕은 북방의 왕”이라 단정했다.
“상토(설로부터 3대)가 맹렬하게 퍼져, 해외에서 끊어졌다(相土烈烈 海外有截)”(시경·상송)는 내용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토는 시조 설의 손자. 중국 학계는 이 기록을 토대로 상토 때 상족의 활동무대를 발해 연안으로 보고 있다. 상토는 무공이 매우 뛰어났으며, 마차를 발명하여 세력을 떨친 이다. 시조 설로부터 7~8대인 왕해(王亥)와 상갑미(上甲微) 때는 “하백(河伯)의 군사를 빌려 유역족(有易族)을 쳐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유역족은 이수이(역수·易水)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으며,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이셴(역현·易縣) 일대이다. 상족이 초기에 이미 허베이성 이셴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고고학자 쑤빙치(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옌산(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1970년대 이후 발해 연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발굴 성과가 이 같은 학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인쉬(은허) 인골의 비밀
상나라 사람들과 발해 연안의 친연관계는 인종학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인골전문가인 판지펑(반기풍·潘其風)은 인쉬(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들을 분석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결과를 얻어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이것은 황허 중하류의 토착세력, 즉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이 모든 중국 문헌과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로 미루어 보면 BC 6000년(차하이·싱룽와 문화)부터 시작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그 유명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를 거쳐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 무렵~BC 1500년·즉 고조선 시기)를 이뤘다.
그리고 상나라의 시조 설은 차하이·싱룽와 문화-훙산문화의 맥을 이은 발해문명의 계승자로서, 샤자뎬 하층문화의 주인공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과 그의 손자 상토, 그리고 7~8대인 왕해와 상갑미 대를 거치면서 발해문명의 계승자들은 남으로 뻗어갔으며, 급기야 BC 1600년 무렵 중원의 하나라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쑤빙치가 “하나라 시대에 이미 중국 동북방 발해 연안에는 하나라를 방불케 하는 강력한 방국(方國), 즉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언한 이유다. 물론 중국 문헌에는 다링허·랴오허 유역, 즉 발해 연안을 풍미한 발해문명의 주인공들이 과연 누구인지 적혀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중국 학계는 단순히 상나라의 선조가 동북민족과 관련이 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냥 ‘연나라의 옛 땅’이라는 군색한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했듯 상나라를 이룬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 우리의 역사를 이룬 우리 민족과는 강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의미심장한 부여
이제부터는 상나라와 동이,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과의 친연성을 차근차근 다져보자. 먼저 시조설화.
“(목욕을 갔던)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설(契·상나라의 시조)이다.”(사기 은본기)
“북이(北夷)의 탁리국(탁리國) 왕이 출행했는데, 왕의 시녀가 후에 임신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전에 하늘 위에 기를 보았는데, 큰 계란 같았다.’(혹은 닭처럼 생긴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시켰다) 이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뒤에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을 했다. 곧 부여의 시조이다.”(후한서 동이전 부여조·논형 길험편 등)
“옛날 시조 추모왕이 창업의 기초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오니 성덕이 깊었다. 이는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광개토대왕릉비)
재미있는 신화의 공통점이다. 상(은)나라의 시조신화와 부여·고구려 등 동이족의 신화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중국학계도 “새알을 삼켜 탄생하는 이른바 난생신화는 (중원이 아니라) 동북아 민족의 공통분모”(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라고 인정한다.
“하늘이 현조(玄鳥·제비)에 명령해 상나라 조상을 낳아 넓디넓은 은땅에 살게 했다”(시경 상송 현조·詩經 商頌 玄鳥)는 기록은 상나라와 새의 깊은 관계를 웅변해준다.
고조선과 발해문명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으므로(경향신문 1월26일자 ‘고조선과 청동기’ 참조) 생략한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조상’인 부여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고조선과 달리 중국측 문헌자료도 풍부하기에 논란의 여지는 적어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부여에 관한 중국사서와 우리측 문헌인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우선 중국 위·촉·오 등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와 중국 후한의 정사를 기록한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유송의 범엽이 5세기 무렵 저술), 그리고 당태종의 지시로 편찬된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측 사료를 종합해보자.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사람들은 거칠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창, 칼로 무기를 삼으며~음식을 먹는 데 조두(俎豆·제기)를 썼고, 모일 때에는 벼슬이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권했다. 또한 읍을 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은(상)나라의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以殷正月祭天)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連日飮食歌舞),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흰색을 숭상하고 해외에 나갈 때는 비단옷 입기를 숭상한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소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숫자가 많을 때는 100명이 되었다. 남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걸이와 패물을 떼어놓으니 이는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大體與中國相彷彿也)” 글귀마다 숨어있는 뜻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므로 다소 장황하게 인용했다. 상나라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은나라 역법을 쓴 이유는
“부여가 은(상)나라 달력을 써서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지. 역법(曆法)이라는 것은 왕권국가의 상징이에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역법을 바꾸어 새 왕조가 천운에 따랐음을 나타냈어요.”(이형구 교수)
역법이 왕권과 국가의 상징일진대 부여가 하·주·진의 역법이 아니라 상나라의 역법을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이형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참조)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BC 1600년) 상나라 성탕은 바로 상나라의 역법을 새로 만든 것 외에도 옷색깔(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하나라는 흑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를 탔고, 제사 때는 흑생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는 백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는데~.”(예기 단궁상·禮記 檀弓上)
이것은 앞서 언급한 부여의 습속, 즉 “부여가 ‘흰색’을 숭상했다”는 사료와 일치한다. 이뿐이 아니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紂)왕은 온갖 악행으로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랬다면 물론 나쁜 짓이지만, 한번쯤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주왕은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사기 은본기)
이 대목에서 “(부여에서는) 음식과 가무를 즐기고,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선양/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ㆍ중원통일 상나라는 발해문명의 후예 “은나라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제곡(帝곡·황제의 증손자라 함)의 둘째부인이다. 간적 자매가 목욕을 하러 가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했다. 그가 설이다.”(사기 은본기)


안양 인쉬(殷墟)에서 확인된 상나라 말기의 건축유적. 주 무왕에 의해 패배하여 분신자살한 주왕의 궁전이었을 것이다. l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 제공
사기에 나오는 은(殷)은 본래 상(商)나라이다. 최근 중국학계와 정부는 ‘하상주 단대(斷代) 공정’에 따라 상나라의 연대를 확정했다. 즉 BC 1600년에 성탕(成湯)이라는 영웅이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BC 1300년에 은으로 천도한 뒤 BC 1046년 주(紂)임금 때 주(周) 무왕에 의해 멸망했다. 은이라는 나라 명은 상왕조의 마지막 도읍 명칭인데, 주나라 사람들이 은으로 낮춰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상나라는 폭군의 나라?
상(은)나라는 왠지 ‘폭군의 나라’ 혹은 ‘망국의 한(恨)’을 연상시키기 십상이다.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난행이 너무도 생생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桀)과 함께 ‘걸주’라는 이름으로 폭군의 상징이 됐다.
‘요망한’ 애첩 달기(己)의 비위를 맞추려 술로 연못을 만들고, 숲에 고기를 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를 뛰어놀게 한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 기름을 바른 구리기둥을 숯불 위에 걸어놓고 죄인을 걷게 하고는 떨어져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깔깔댔다는 ‘포락지형(포烙之刑). 신하이자 서형(庶兄)인 비간(比干)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자 “성인의 심장엔 구멍이 일곱개가 뚫렸다는데 한번 보자”면서 심장을 해부한 만행의 줄거리는 지금도 뭇사람들을 진저리치게 한다. 제후들을 죽여 포(脯)를 떠서 소금에 절인 뒤 다른 제후에게 보내 맛을 보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그것으로 충성도를 시험했다니…. 충신인 기자(箕子)가 망국 후에 황폐해진 도읍지(인쉬·殷墟)를 지나다가 지었다는 ‘맥수지가(麥秀之歌)’는 지금도 망국의 슬픔을 상징한다.
“(파괴된 궁실 자리에 곡식 자란 모습을 보며) 보리는 잘 자랐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파릇하구나. 개구쟁이 어린애(주왕)야! 나하고는 사이좋게 지냈더라면….” 맥수지가는 여전히 유학계나 한문학계에서 최고의 산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천하 쟁탈전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 왕조교체 후 전대의 마지막 왕을 망나니로 만들어 버리는 예는 하나라 걸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상나라의 폄훼는 더 심한 편이다. 주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후대의 사가들이 지어낸 과장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저우 상성에서 확인된 청동 술잔.
상 나라의 실체를 알면 더욱 확실해진다. 하·상·주의 왕조교체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다. 지금의 개념대로라면 동이족이 한족(漢族)과 처절한 중원쟁탈전을 벌인 끝에 하나라를 무찌르고 550년 가까이 천하를 통일했다. 그것이 바로 상나라이다. 그런 상나라를 다시 중원의 종족(한족·漢族)이 몰아내고 주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줄곧 한족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상나라는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갑골문자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으며, 동양의 예제를 확립했잖아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우리는 한때 천하를 풍미했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남겼지만, 망국의 한을 품으며 홀연히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 이 상나라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를 쏙 빼닮은…. 우선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대로 상나라의 역사를 일별해보자.
천하를 통일한 동이
상나라 시조인 설(契)은 요순 시절에 우(禹)의 치수를 도운 덕에 상(商)이라는 곳에 봉지를 받았다. 그래서 상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겼다. 상토(相土·설로부터 3대)는 마차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해외’에까지 넓혔다. 그리고 왕해(王亥·7대)는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부락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다. 훗날 왕해는 유역(有易)이라는 마을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는다. 왕해의 아우 왕항(王恒)은 유역족을 대패시키고 그 족속의 재물을 빼앗았다. 세력을 넓혀간 상은 훗날 성탕이라는 영웅을 만난다. 탕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요리사 출신인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등용, 국세를 떨친다. 이 무렵 하왕조는 걸 임금의 학정 때문에 멸망기에 접어든다. 천하의 인심을 얻은 성탕은 도읍을 ‘박(毫)’으로 옮긴 뒤 드디어 11차례의 접전 끝에 하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때가 BC 1600년이다.
그 뒤에도 역마살이 끼였는지 하왕조 멸망 뒤에도 다섯차례나 도읍을 옮겼는데, 반경(盤庚)이 BC 1300년 은으로 천도한 뒤에야 완전히 정착했다.(웨난의 ‘하상주 단대공정’(일빛) 참조) 상은 은 천도 이후에도 12명의 왕이 254년 동안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우다가 멸망한다. 마지막 왕인 주왕은 나중엔 폭군이 되고 여성의 치맛폭에 싸여 천하를 그르쳤지만 “처음엔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사기 은본기)”였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자꾸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양념으로 인용해보자.
“665년, (의자)왕은 궁녀와 함께 주색에 빠지고 즐기기만 했다.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간언하자 화가 난 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인지, 아니면 ‘승자의 전리품’이라는 역사의 기록이 되풀이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발해문명의 후계자
BC 6000년부터 잉태한 발해문명의 후계자였던 상나라의 문명은 대단했다. 중국학계는 상나라가 중원 하나라(BC 2070~BC 1600년)의 일개 소국이었고, 차츰 세력을 넓힌 뒤 성탕 때(BC 1600년)에 하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랬을까.


인쉬에서 발굴된 갑골. 갑골에 새겨진 문자(갑골문자)는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우 선 도성의 규모를 보자. 도성은 국가의 중심이자 왕조의 위세를 나타내주는 상징이다. 그런데 상나라는 멸망 때까지 10차례가 넘는 천도가 있었으나, 흩어져 있는 도성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다. 모든 상나라 도성이 판축기법으로 쌓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으로 보면 기원 후 1세기 때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풍납토성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
먼저 성탕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 허난성(河南省) 옌스(언사·偃師)상성의 궁전터는 그 규모가 19㎢에 달했다. 성탕은 하를 멸한 뒤 다시 허난성 정저우(정주·鄭州)에 도읍했는데(중정·仲丁 시기에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25㎢였다.
정저우 상성의 경우 궁전 내부에서는 100기 정도의 인골이 묻힌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순장제도 혹은 사람을 제사에 바친 증거로 보인다. 외성에서는 중·소형 무덤이 100여기 확인됐다. 이 무덤에서는 력(격·솥의 일종), 작(爵·술잔), 분(盆·물과 술 담는 동이), 규( ·제사에 쓰이는 세발달린 가마솥), 언( ·시루), 존(尊·술그릇) 등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노예들이 거주하면서 수공업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이는 상나라 시기에 노예제가 확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또한 인쉬(은허·殷墟)유적의 발견은 뭇사람들의 시상을 자극할만한 한편의 대서사시 같다. 1899년 가을. 심한 학질에 걸린 왕이룽(왕의영·王毅榮·국자감 좨주)은 의사에 처방에 따라 ‘용골(龍骨)’이란 약재를 구입했다. 그런데 그는 약재에 뭔가 전서(箋書)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금석학자인 그는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이것은 훗날 갑골문으로 확인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갑골이 허난성 안양센(安陽縣)의 샤오둔춘(小屯村)에서 집중 출토된 것을 파악한 중국학계는 1928년부터 본격 발굴에 들어갔다. 15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2만4794점의 갑골이 발굴되었다.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인 한자의 원형, 즉 갑골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인쉬는 BC 1300년부터 BC 1046년 주왕이 분신자살할 때까지 상나라의 도읍지였으며, 254년간 이른바 은나라 시대를 이끈 곳이다. 망국의 한이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녹아있는 바로 그 인쉬…. 이곳에서는 갑골문자뿐 아니라 궁전터와 종묘유적, 그리고 왕과 귀족의 무덤떼가 고스란히 확인되었다. 이른바 인쉬에서는 100㎏이 넘는 청동기를 주조하던 주형(鑄型)이 확인되는 등 크고 정교한 청동기와 옥기가 대량으로 쏟아졌다. 발굴성과가 중국역사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전설상의 나라로 여겨진 상나라의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갑골문이 해독되면서 상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가 ‘소설’이 아니라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수수께끼의 열쇠
“이로써 상나라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지. 상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나서거나 큰 일을 치를 때는 그 길흉을 점쳤다는 것과, 신과 인간을 소통시키는 신권과 왕권의 복합왕국이었다는 것까지….”(이형구 교수)
특히 ‘발해산’ 청동기로 무장한 상왕조는 청동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하나라를 압도했다. 짐승문양, 도철(괴수)문양 등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청동예기는 물론, 다양한 형태와 쓰임새가 자랑인 다양한 생활용기도 상왕조의 문화를 살찌웠다.

그렇다면 상나라 문화와 동이족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이미 상나라가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BC 5000년)-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샤자뎬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고조선의 문화로 여겨짐)의 찬란한 발해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BC 1600년 무렵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하여 중원 하나라를 쓸어버린 뒤 천하를 통일한 나라가 상나라라고….
그러면 중국학계는 이 상나라와 상나라 문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 상(商)을 건국했다면 발해연안엔 어떤 나라가 존재했을까. 그리고 상나라가 망한 뒤 발해연안에 건국되었다는 기자조선의 실체는 무엇일까. 또한 상나라 문화를 쏙 빼닮은 부여국의 존재는 무엇이며, 중국인들은 동이의 역사 가운데 왜 유독 부여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서술할까. 이것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 보따리다.
〈 선양·뉴허량 |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7. 유물·유적 토대로 추정한 청동역사 / 발해문명 흐름도 “기 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고교 국사교과서)

이 형구 선문대교수가 뉴허량의 �싼쯔 금자탑(피라미드) 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청동기를 제작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도가니 잔편이 확인되었다. 그 연대는 BC 3000년까지 올라갈 수 있가는 평가다. <뉴허량|김문석기자>
지 난해 2월, 교육인적자원부가 2007년판 국사교과서를 공개하자 학계가 한바탕 요동쳤다. 새 교과서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개막을 기존 교과서 내용(BC 10세기)보다 500~1000년 앞당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애매한 인용문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확정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뒤늦은 감이 있다”는 환영론이 나왔지만, 학계 일각은 “올려도 너무 올렸다”고 아우성쳤다.
#한반도를 벗어나라
기자는 논쟁의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자 발명품이라는 ‘국사’라는 개념과 학문을 없애지(국사 해체론자들의 주장처럼) 않는 한, 우리 역사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발해연안’까지 넓혀봐야 한다는 것이다. 청동기의 기원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면’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제 ‘눈을 들어’, 그 옛날 이른바 동이족이 다른 족속과 어울려 발해문명을 창조해낸 발해연안을 바라보라. 그러면 논쟁 또한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운을 떼면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기원은 발해연안이며, 그 연대는 BC 3000년(훙산문화 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 시기에는 석성을 쌓고 청동기를 만들었으며, 고대 왕국의 기틀을 쌓은(고조선) 발해연안 사람(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商·BC 1600~BC 1046년)를 건국했다는 점까지.
#청동꺾창의 비밀



1986 년 3월, 랴오닝성 진저우(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이었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진셴(錦縣) 수이서우잉쯔(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이 죽어갔다는, 유명한 요택(遼澤)을 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샤자뎬 하층문화에 속하지만 고조선과 연관성이 매우 깊은 지역이다.
그때까지 발견된 청동꺾창은 대부분 자루(柄)부분이 목재여서 썩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꺾창은 몸 전체를 청동으로 주조한 게 특징이었다. 청동꺾창의 무게는 1.105㎏에 달했고, 전체 길이는 80.2㎝였다. 연대는 BC 1500년으로 평가됐다.
이 청동꺾창은 중원의 허난성(河南省) 중부 옌스셴(偃師縣) 얼리터우(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꺾창(연대는 BC 1500년 추정)과 매우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둘 다 상나라 초기, 즉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꺾창이라는 뜻이며, 상나라의 전통이 발해연안에서도 숨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청동꺾창은 선사시대에서는 농사용, 즉 수확용 돌낫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해요. 그리고 직접적인 단서는 바로 발해연안에서 나왔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이 교수가 말하는 유물은 랴오둥(요동·遼東) 반도 남단 양터우와(양두와·羊頭窪)에서 확인된 돌꺾창(石戈)를 가리킨다. 리지(李濟)는 “양터우와 문화의 연대는 하(夏·BC 2070~BC 1600년) 연대와 비슷하다”면서 “이 돌창이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조선 수장의 권장(權杖)


발해만 연안에서 확인된 청동꺽창. 실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예제용 청동기로 보이며 고조선 시대 수장의 권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청동기 기원뿐 아니라 고대국가(고조선) 형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 래 과(戈·꺾창)를 자전에서 찾으면 ‘한두 개의 가지가 있는 창’이라는 풀이와 함께, 두번째 뜻으로 ‘전쟁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과가 오늘날의 총 같은 대표적인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을 살펴보라. 비실용적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과는 원래 무기다. 때문에 창날(戈) 부분은 무게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 날을 세우고, 자루부분은 가벼운 나무를 사용한다. 그래야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수이서우잉쯔 청동꺾창은 창날과 자루를 모두 미끈한 청동으로 만들었다. 가벼워야 할 자루(柄)는 무겁고 두껍다. 반면 과는 얇고 가볍다. 또한 자루 양면은 정교한 문양을 주조했고, 녹송석(綠松石)으로 요철식 상감을 해놓았다. 이래가지고서야 무기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살상무기가 아니라 의례(儀禮)용 병기로 볼 수밖에. 이른바 권장(權杖), 즉 권력를 상징하는 지팡이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청동꺾창이 나온 수이서우잉쯔는 랴오둥 반도와 인접한 곳에 있어요.”(이교수)
여기서 기자는 이교수의 강조점을 듣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수이서우잉쯔.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 즉 고조선의 터전이고, 청동꺾창은 바로 고조선의 수장(왕)이 지녔던 권장이 아닌가. 기자는 “기자(箕子·상이 망한 뒤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상나라 귀족)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상서(尙書)의 기록을 떠올렸다. “기자(箕子)가 조선을 건국했다”가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뜻이니, 기록상으로도 이미 발해연안에 조선이 존재했다는 의미 아닌가. 또 하나,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했던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의 거대한 석성 역시 고조선의 유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경향신문 2007년 10월13일 ‘고조선 추정 싼줘뎬·청쯔산 유적’ 참조)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BC 3000년

좐싼쯔에서 확인된 도가니편들. 동북아 청동기 문화의 기원논쟁에 핵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수 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병기의 예제화(禮制化)를 뜻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인 셈이다. 벌써 BC 1500년 무렵에 이토록 예제의 완벽한 모습까지 갖춘 청동기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청동기의 기원은 언제란 말인가. 기자는 다시 뉴허량(牛河梁) 13지점에서 보았던 이른바 좐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를 주목했다.(경향신문 12월1일자 ’뉴허량의 적석총들’ 참조) “BC 3500~BC 3000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거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함께….”(이교수)
이 는 매우 중대한 뜻을 담고 있다. 맞다면 기존 중국 청동기 시대의 개막연대(BC 2000년)보다 1000년을 앞당긴 중국고고학사의 쾌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과기대 야금연구실 한루빈(韓汝) 교수는 1993년 베이징대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지층이 교란되었다는 점이 제기되어 여전히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중국학계는 실마리를 놓치 않았다.
“피라미드 도가니 지층에서 확인된 고풍관(鼓風管·높은 열을 내려고 바람을 불어 넣는 관)의 구멍을 보라.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인들의 벽화에 표현된 청동기 제작 과정과 완전히 똑같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이 뿐이라면 또 “‘초’를 치는군”하면서 중국인 특유의 ‘허풍’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단·신전·적석총이 확인된 뉴허량 제2지점 4호 적석총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환식(環飾·고리 장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사단이 분석해보니 홍동질(紅銅質), 즉 원시청동인 순동이었다.
증좌가 또 있다. 1987년 우한치(敖漢旗) 시타이쯔(西台子) 유적, 즉 훙산문화(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문화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도범(거푸집)이다. 도범의 속에는 낚시바늘 형태의 틈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청동낚시바늘을 만들기 위한 주형(鑄型)이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발굴 성과를 토대로 추측하면 중국의 청동기 시대, 아니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BC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때란 얘기다. 그런데 이런 훙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샤자뎬(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상나라로 그대로 넘어온다.
#훙산문화→고조선→상나라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BC 1500년)도 중요하지만, BC 1600년 유적으로 평가되는 다뎬쯔(大甸子) 유적도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상나라 문화를 연결해주는 상징적인 유적이죠.”(이교수)



1973 년 다링허(大凌河) 유역 우한치 다뎬쯔에서는 모두 1683건의 도기(陶器)가 확인됐다. 도기 가운데는 400점에 달하는 완전한 채회도기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도기의 모양이라든가, 문양의 모티브가 훗날 상나라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특히 솥과 잔, 사발, 시루, 단지에 나타난 도철(괴수의 얼굴)·운뇌문(雲雷·구름과 번개)·목뇌(目雷·눈과 번개)·기룡(夔龍·추상화한 용) 문양 등은 상나라의 청동기 문양과 똑같다. 그리고 싼줘뎬·청쯔산의 거대한 석성 역시….
결국 이 모든 것을 정리해보자.
지 금으로부터 5000년 전인 훙산문화 시기에 청동기 문화의 맹아가 텄다. 그리고 훙산문화부터 시작된 등급사회와 예제가 갈수록 발전했고, 청동기와 석성, 적석총의 전통이 샤자뎬 하층문화 시기에 꽃을 피웠다. 쑤빙치(蘇秉琦)의 말처럼 발해연안에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BC 1600년)와 같은 반열의 강력한 방국(方國·왕국의 의미)이 존재했다. 쑤빙치는 그 방국이 어디인지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방국은 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발해문명 창조자 가운데 일부 지파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BC 1600~BC 1046년)를 건국한다.
이 모든 해석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이다. ‘고조선 부분’만 빼고…. 쑤빙치를 비롯한 중국 고고학자들이 (훗날 중원을 제패한) 상나라 문화의 기원은 발해만에 있었다(先商文化在渤海灣)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7. 유물·유적 토대로 추정한 청동역사 / 발해문명 흐름도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동영상|이다일 기자 crodail@khan.co.kr〉
‘황제(黃帝)집단=훙산(紅山)문화 대표. 옌산(연산·燕山) 남북지구가 주요 활동범위. 어렵이 주요 경제활동.’
‘신농씨(염제) 화족(華族)집단=양사오(앙소·仰韶)문화 대표. 중원 속작(粟作)농업이 주요 활동범위.’
지난해 7월30일, 이른바 랴오허(遼河)문명전이 열리던 랴오닝성 박물관 전시실.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이라는 제목의 전시공간은 기자의 눈과 귀를 멎게 했다. 훙산문화 시대를 오제전설과 연결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황제를 훙산문화 대표로 ‘등록’한 것이었다.


훙 산문화와 오제전설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랴오닝성 박물관 전시공간. 황제와 치우의 전쟁이 벌어진 쌍간허 유역 쭤루의 인근 위센에서 훙산문화와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 공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중국인의 조상이라던 황제(黃帝)를 동북의 훙산문화 대표로, ‘염제 신농씨’를 중원의 양사오 문화 대표로 둔갑시켜 놓았다. <선양/김문석 기자>

-마오쩌둥도 찾은 황제릉- 참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가 누구인가. 중국인의 조상이 아닌가. 그런 황제가 동이(東夷)의 땅을 대표한다는 것이니…. 그렇다면 치우는? 단군은?
굳이 옛날 기록을 들출 필요도 없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된 쑨원(孫文)이 서둘러 한 일은 황제(헌원)에게 제사지내는 것이었다. 훗날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나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도 1937년 국·공합작 뒤 다투어 찾아간 곳도 바로 황제릉이었다.


“황제께서 천명으로 나라를 세우시고~. 추악한 치우를 주살하시어 화(華)와 이(夷)를 구분지었네.”(국민당의 제문)
“(황제가) 위대한 창업을 이루시니~. 그러나 그 후예들은 황제만큼 용맹스럽지 못해 큰 나라를 망가지게 했네.”(마오쩌둥의 제문)
이렇듯 너나 없이 ‘축록(逐鹿) 황제릉!’을 외치며 다투어 황제릉을 향해 달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황제가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국통의 상징이자, 민족정체성의 상징”이었으며 “공산당과 국민당도 비록 정치적인 목표가 달랐지만 권력의 정통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황제를 끌어들이려 한 것”(김선자의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책세상)이다. 중국인들은 왜 자존심을 버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추앙해온 황제를 오랑캐의 땅으로 폄훼하던 훙산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으로 바꿔 부르는 것일까. 누누이 강조하듯 1970년대 이후 발해연안에서 무수히 발견된 문명의 흔적 때문이었다.
-황제는 훙산 고국의 초대왕?-
중국의 용 사상이 잉태한 곳이 바로 이곳(차하이·査海·BC 6000년전)이었다. 제단과 신전, 무덤(적석총) 등 3위 일체의 제사유적을 핵심으로 하는 훙산문화가 창조된 곳(뉴허량)도 바로 이곳이다. 즉 제정일치 사회의 왕이 존재한 고국(古國)이 탄생한 곳이다.
그러니 중국인의 입장에서 황제는 ‘훙산 고국’의 초대 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엔 크게 당황했던 중국학계는 정신을 차린다. 바로 전설과 고고학 자료들을 교묘하게 끼워 맞춘다. 우선 뉴허량 출토 곰의 뼈를 두고는 “사마천의 사기에 ‘황제는 유웅씨(有熊氏)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곰과 황제를 연결시킨다.
그리고 1970년대 말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張家口) 지구 쌍간허(상건하·桑乾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함께 발견된 유물 2점에 주목한다. 동북 훙산문화의 대표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항아리)과 중원의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꽃무늬 채도가 한 곳에서 나온 바로 그 곳. 이는 훙산문화와 양사오 문화가 접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중국학계는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역사기록을 떠올린다.
“이 장자커우 인근에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가 싸웠다는 반취안(판천·阪泉)과 줘루(탁록·탁鹿)란 곳이 있어요. 중국학계는 바로 이 인근에서 동북 훙산문화 유형과 중원 양사오 문화가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해석하기에 이르렀지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피가 백리나 흘렀다”-
사서에 따르면 훙산문화 시기에 즈음해서 문명의 충돌이 두 번 있었다. ‘염제(신농씨) vs 황제’의 ‘반취안(판천) 전쟁’과 ‘황제 vs 치우’의 ‘줘루(탁록) 전쟁’이었다.
“염제(신농씨)가 제후들을 침범하려 했다. 헌원(황제)은 곰과 범, 살쾡이 같은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에서 여러 번 싸운 뒤에야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켰다. 헌원은 제후들과 함께 나서 탁록(탁鹿)의 들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사기 오제본기)
‘장자(莊子)’에는 “들판에 피가 백리나 흘렀다”고 했다. 병장기가 핏물에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고대 동양문명의 맹주를 놓고 벌인 ‘1·2차 대전’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인들에게 황제(헌원)는 이민족의 도전을 뿌리치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동양문명의 창시자였다. 그야말로 “황제는 중국인의 자존심이자 정체성 그 자체”(정재서 교수의 ‘동양신화’·황금부엉이)였던 것이다.
-염제 vs 황제의 1차대전-
그러나 훙산문화 발견 이후 중국학계는 황제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한다.
쑤빙치는 ‘통고(痛苦)의 연구’ 끝에 황제의 고향을 중국 동북방, 즉 훙산문화의 본거지인 발해연안에서 찾은 것이다. ‘훙산시대=황제시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고고학 성과와 역사서의 오제전설 기록을 토대로 지금부터 5000년 전후의 문화구를 3대 고고문화구로 나누었다.
즉 훙산문화의 동북문화구, 양사오 문화의 중원문화구, 그리고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의 동남연해문화구 등이다. 그리고 고대 전설상의 오제시대를 다시 전·후기로 나누었다. BC 3500~BC 3000년전 시기를 전기, BC 3000년전~하나라 건국(BC 2070년) 이전을 후기로 각각 구분했다.
훙산문화는 바로 오제시대 전기, 즉 양사오 문화와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훙산문화는 중국문명 기원 과정에서 한걸음 먼저 나갔으며(先走一步) 양사오 문화와 기북(冀北·허베이성 서북부)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바로 제1차 대전인 ‘황제 vs 염제 전쟁’이며, 시대는 오제시대 전기(BC 3500~BC 3000년)에 일어난 일로 보았다.
즉 훙산문화의 용무늬 토기와 양사오 문화의 꽃무늬 채도가 싼간허 유역 싼관 유적에서 공반되어 나온 것은 바로 이 ‘황제 vs 염제 전쟁’을 의미한다.
이 것은 쉬즈펑(徐子峰) 츠펑대교수의 말처럼 “두 문화가 충돌한 동시에 교류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쑤빙치는 “이렇게 충돌·교류한 문화는 다시 발해연안으로 올라가 그 유명한 훙산문화의 단(제단)·묘(신전
)·무덤(총·적석총)으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이뤘다”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학계는 동북방과 중원문화의 충돌·교류 이후 훙산 고국(古國)이 탄생했다고 보았지. 훙산 고국의 초대 왕은 ‘황제’라는 것이고….”(이형구 교수)
쑤빙치 등은 황제의 고향을 동북방으로 연결했다. 황제가 염제와 싸울 때 함께 전쟁터에 나선 곰과 범, 살쾡이 등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은 부족들의 명칭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또한 사기 오제본기는 “황제는 일정한 거처없이 옮겨 다녔다”고 했다. 중국학계는 이를 ‘황제족’의 성향을 일컫는 것으로 동북방 민족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보았다.

-황제 vs 치우의 2차대전-
그렇다면 동이족의 신으로 알려진 치우는 무엇인가. 중국학계는 바로 ‘황제 vs 치우 대전’ 역시 오제전설과 역사서를 고고학 성과와 끼워맞춘다.
즉 ‘황제 vs 치우’전을 오제시대 후기(BC 3000~BC 2070년)에 일어난 ‘사실’로 본 것이다.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황제족과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치우족의 문화, 즉 다원커우 문화가 역시 충돌·교류한 증거라는 것이다.
BC 3000년 무렵 다링허(大凌河)와 시랴오허(西遼河)에서는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이른바 훙산후(紅山後) 문화라 하는 샤오옌(소하연·小河沿)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는 다시 조기 청동기-샤자뎬(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 성장했 다. 그런데 이곳에서 누공두(鏤孔豆·구멍뚫은 굽달린 접시)와 주전자(壺), 고족배(高足杯·다리가 높은 그릇) 등 다원커우 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유물들이 속출한다. 바로 이것이 동북방(훙산문화 계열)과 동방(산둥반도)의 충돌 및 교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사기 오제본기는 황제·염제 싸움을 먼저, 황제·치우 싸움을 나중에 기록했다”면서 “고고학 성과를 검토하면 역사서가 딱 들어맞는다”고 자화자찬한다.
-치우는? 단군은?-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 이 해석대로라면 훙산문화의 창조자와 치우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훙산문화의 주인공은 황제이고, 산둥반도 다원커우 문화의 주인공이 치우라는 이야기이니….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또 하나.
중국학계는 황제를 비롯한 오제전설(황제·전욱·제곡·요·순) 주인공들의 고향을 대체로 동북방으로 본다는 것이다. 훙산문화를 꽃피운 것은 바로 황제라는 것이다. 후계자 전욱(전頊)도 “북방의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얻는다. 뉴허량 신전에서 끊어진 하늘과 땅의 관계를 혼자 독점하며 제정일치 시대를 이끈 이가 전욱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곡(帝곡·3대왕)은 훗날 상나라의 선조라고 했다.
모골이 송연하다. 이미 ‘하상주 단대(斷代)공정’을 단행, 전설상의 하나라 건국연대를 BC 2070년이라 확정한 중국이다.
그렇게 올려놓은 중국역사가 4000년이다. 그런 중국학계가 이젠 더 나아가 발해문명, 즉 훙산문화를 창조한 이가 바로 황제이며, 그 황제가 중국인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다시 전설의 1000년 역사가 ‘사실(史實)’로 회복된다. 이른바 중국문명 5000년이 확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문명 탐원공정’의 핵심이다.
우리 학계는 중국으로부터 헤어나고 싶은 망령과, ‘실증할 수 없다’는 지나친 결벽증(?) 탓에 제대로 된 연구조차 ‘재야사학’이라며 무시하고 있다. 그런 사이 중국학계는 이미 ‘중국문명 5000년’의 틀을 짜놓고 있는 것이다. 발해연안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적석총과 빗살무늬 토기, 그리고 곰 숭배의 원형들….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로 그 역사가 황제의 역사라면, 치우와 단군, 그리고 웅녀 등 우리 민족의 흔적은 깡그리 무시되는 셈이다.
전설과 고고학 성과를 완벽하게 끼워 맞추는 중국학계의 움직임과 우리 학계의 무력함에 기자는 가슴이 탁 막혔다.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닷컴|이다일 기자 crodail@khan.co.kr〉
“헌원(황제)의 시대에 신농씨의 세력이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헌원이 곰(熊), 큰 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길들여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 번 싸운 끝에 뜻을 이뤘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켜 헌원의 명을 듣지 않아 헌원이 제후들로부터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아 신농씨(염제)를 대신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
중국 역사서 사기 오제본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담긴 함의와 선후관계를 떠올리면서 이 글을 풀어야 할 것 같다.
#깨지는 중화사상


량주 문화의 본산인 량주 판산 무덤. 한 개의 무덤에서 수많은 옥벽(둥근 옥)이 쏟아졌다. 훙산 옥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역사계는 중원중심, 한족(漢族)중심, 왕조중심의 중화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왜 춘추전국 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았겠습니까. 그것은 장성이북, 옌산(연산·燕山)이북은 본래 오랑캐의 소굴이고 단지 중원문화의 수혜를 받은 문화열등지역이라고 폄훼했기 때문입니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중국은 예로부터 사방의 오랑캐들을 사이(四夷)라 했는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했다. 얼마나 천대하고 괄시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중국학계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BC 3000년) 유적의 출현 때문이었다. 물론 1930~40년대에도 장성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융합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시 발해유역에서 동북문화 특징인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통형관)와 중원 양사오(앙소·仰韶)문화의 특징인 홍도 및 채도가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우월한 중원의 양사오 문화가 열등한 훙산문화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 오랑캐의 소굴인 동북방 뉴허량(우하량·牛河梁)과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그리고 무덤(塚) 등 엄청난 제사유적이 3위 일체로 확인된 것이다. 이뿐인가.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중국 용신앙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용형 돌무더기가, 차하이-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에서 옥기의 원형과 빗살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등이 쏟아졌다. 중국학계는 기절초풍했다.
#휘황찬란한 량주문화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역시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양쯔강)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량주(양저·良渚)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훙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량주문화의 찬란한 옥기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터와 제사유적 등.
예컨대 량주문화의 대표격인 량주 유적은 30㎢의 면적에 50곳이 넘는 건축지와 거주지, 고분군을 자랑한다. 특히 판산(반산·反山) 12호는 중심대표인데, 그곳에서 나온 옥월(玉鉞·옥으로 만든 도끼)과 옥종(玉琮·구멍 뚫린 팔각형 모양의 옥그릇) 등 옥문화는 휘황찬란 그 자체다.
“훙산문화의 옥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죠. 량주보다는 이른 시기인 훙산옥은 사실적이고 조형적인 반면 량주의 옥문화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정교합니다. 옥에 세밀화를 그린 듯한 1㎜의 세공기술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죠.”(이교수)


량주 유적에서 확인된 옥종(예기). 훙산옥이 조형적인 반면 량주 옥문화는 세밀화를 그린듯 정교함을 뽐낸다.
옥월과 옥종은 예기이자 위세품이다. 옥종이 의식에 사용됐다면 옥월을 포함한 각종 부월(도끼)은 군권을 뜻한다. 이 판산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신권과 군권을 한꺼번에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판산 인근의 모자오산(막각산·莫角山) 유적군은 량주문화 유적군의 중심점이다. 동서 길이 670m, 남북 폭 450m로 전체면적이 30만㎡에 달한다. 높이 10m의 인공토축을 쌓았고, 그 위에 작은 좌대를 3개 조성했다. 유적에는 좌우로 나란히 배열된 직경 50㎝가 넘는 나무기둥들이 있고, 20m가 넘는 초목탄층과 홍토 퇴적층이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이곳이 궁전터이자 제사를 지낸 곳임을 방증해준다. 야오산(요산·瑤山) 유적에서는 홍색, 회색, 황색 등 3색으로 조성된 대형제단과 묘지가 확인되었다. 량주 유적 조사단은 한마디로 “이곳에는 궁전과 제사기능을 갖춘 대형건축물 혹은 도성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 古國(훙산)과 方國(량주)
문제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의 관계였다.
“량주문화 초기의 옥기를 보면 규범화한 짐승얼굴 도안이 대량 활용되었는데, 이는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용형 옥기의 원형을 연상시키거든. 이는 량주문화가 훙산문화의 영향을 또 받았다는 거지.”(이교수)
오랑캐의 본거지에서 잇달아 중원을 능가하는 문화가 터지자 중국학계는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의 표현대로 “통고적(痛苦的), 즉 쓰라린 아픔을 겪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황하 중류(중원)는 중국문명의 중원(中原)이 아니었음을….
중국고고학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는 차례로 중원으로 몰려와 중화대지에서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했다. 후에 들어서는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나라와 상나라를 형성·발전시키는데 초석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쑤빙치는 그러면서 중화문명론이라는 것을 개진했지. 즉 3부곡(部曲)이라 해서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의 3단계론을…. 그러면서 훙산문화를 중국 최초의 원시국가단계인 고국, 량주문화를 그 다음 단계, 즉 제후국의 형태인 방국으로 규정한 것이지.”
쑤빙치는 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최고위층, 즉 왕의 신분임을 입증해주는 유적이 확인된 점에 주목했다.
“취락이 있다해서 다 국가단계가 되는 건 아니지. 일반취락과 중심취락, 그리고 중심취락을 초월하는 최고위층의 공간을 갖춰야 국가단계라고 할 수 있거든.”
이미 살펴봤듯 뉴허량은 단·묘·총 등 3위일체의 조합이 엄격하게 구분된 훙산인들의 성지이며, 특수신분인 제정일치시대의 왕이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또한 종교제사 중심인 이곳은 1개 씨족이 아니라 여러 씨족의 문화공동체가 모셨던 곳이었다.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보다 시기가 다소 늦은 량주문화(BC 3200~BC 2200년)는 훙산문화에 비해 취락분화의 층위가 더욱 뚜렷하다. 모든 유적이 정남북의 정교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옥기문화 또한 훨씬 정교했다. 쑤빙치는 이런 량주문화를 ‘방국’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중원을 향해 달려라
그러면서 ‘량주훙산 축록중원(良渚紅山 逐鹿中原)’이란 말로 정리했다. 사슴을 쫓는다는 뜻의 ‘축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유방과 항우가 중원을 향해 다투어 진출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사기에서 딴 이 ‘량주훙산 축록중원’이란 말은 량주문화와 훙산문화가 중원으로 중원으로 질주했다는 뜻이다.
그럼 ‘축록’의 증거들을 살펴보자.


중원 양사오 문화의 본거지인 타오쓰 유적에서 확인된 반용문 토기. 용(龍)의 본향인 훙산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우 선 동북의 훙산문화와 중원의 양사오 문화의 접촉. ‘오랑캐의 문화’를 ‘통고’의 과정 끝에 ‘중국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학계가 주목한 곳은 허베이성(河北省) 서북부였다. 1970년대 말, 쌍간허(桑幹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훙산문화의 대표적인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과, 양사오 문화의 대표선수인 장미문양의 채도(이른바 묘저구·廟底溝 유형이라 한다)가 나란히 나온 것이다. 최근에는 쌍간허 인근 신석기 유적에서 훙산문화 말기에 해당되는 옥조룡(용 조각 옥기)이 출토되었다. 중원인 진남(晋南) 타오쓰(도사·陶寺)유적에서 출토된 주칠을 한 반용문(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 토기그릇과 외방내원(外方內圓)의 옥벽은 훙산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쑤빙치의 결론은 이랬다.
“관중 분지(중원)에서 자생한 장미문양의 채도(양사오 문화)와, 옌산 이북·다링허 유역에서 자란 용인문(龍鱗紋·용과 비늘모양 무늬) 채도 및 빗금토기 옹관(훙산문화)이 북으로, 남으로 향했다. 두 문화는 결국 허베이성 서북부에서 조우했다. 이곳에서 융합된 두 문화는 다시 동북으로 건너가 훙산문화의 꽃인 제단(단)과 신전(묘), 무덤(총)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학계는 이른바 그렇게 창조된 중국문명의 질긴 끈을 베이징 천단(天壇)에서 찾는다. 뉴허량 제단의 앞부분 형태는 천단의 환구이고, 뒷부분은 베이징 천단의 기년전(祈年殿·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낸 곳)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무덤의 구조와 후대 제왕릉의 구조가 흡사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런데 훙산문화만이 이렇게 중원으로, 남으로 퍼진 것은 아니다.
훙산보다 늦은 량주문화의 ‘축록중원’을 살펴보자. 요순시대 유적으로 꼽히는 진남(晋南)의 타오쓰 유적에는 량주식 토기와 옥기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또한 산둥반도 남쪽인 쑤베이(蘇北) 화팅(花廳) 유적은 이른바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도 량주문화의 전형적인 정(鼎·솥)과 호(壺·항아리), 옥(玉) 등이 나왔다. 이는 량주문화가 중원은 물론 산둥반도까지 진출했다는 소리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옌원밍(嚴文明)은 이를 두고 “량주문화가 다원커우 문화를 정복했다”고까지 선언했다.
“중 국학계는 수레바퀴통으로 문화의 접변과 교류를 설명했어요. 5000년전 중국문명은 여러 부족들의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중원으로 모였다고…. 먼저 북(훙산문화)이 중원(양사오 문화)과 교류를 시작하였고, 이어 동남(량주문화·다원커우 문화)과 중원이 교류하고, 북과 동남이 관계를 맺고…. 뭐 이런 식으로 정리했죠.”
중국학계는 모든 문명은 중원에서 나왔다는 ‘일원일체’의 역사관이 훙산·량주 등 여러 문명이 모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다원일체’의 역사관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고대 전설을 이 고고학적인 성과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즉 사기 등 역사서에서 전설로 등장하는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아전인수로 끌어들인다.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를 한번 풀어보자.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우리의 孝와 닮은 꼴…훙산인의 여신 숭배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여신묘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 학계가 ‘여신은 훙산인(홍산인·紅山人)의 조상이며, 뉴허량은 훙산인의 신전이자 성지’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는 아예 훙산인을 중국인의 ‘공동’ 조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훙산인은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중국 학계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니 뉴허량은 ‘동이족의 신전이자 성지’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도 비상한 곳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도 여신이…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여신상 같은 소조상은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함북 청진시 농포동과 웅기군 서포항 유적에서도 소조인물상이 나왔다.
“특히 1956년 출토된 농포동 인물상은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다음 그 아래는 다시 퍼지게 만드는 등 ‘여신’의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둥산쭈이(東山嘴)의 임산부상을 연상시킵니다. 서포항 것은 가슴을 희화적으로 표현한 게 매우 인상적이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랴오둥 반도 궈자춘(郭家村)에서 나온 소조상의 치켜진 눈과 광대뼈는 뉴허량 여신상 및 츠펑 시수이취안(西水泉)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 여인상과 일맥상통한다. 옌볜 자치주 샤오잉쯔춘(小營子村)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인물상도 치켜올라간 눈매와 광대뼈 등 뉴허량 여신상과 비교할 수 있겠다. 과연 5500~5000년 전 여신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숭배의 대상은?


뉴허량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콕 집어 단정을 내릴 수 없다. 뉴허량의 여신 조각상을 보자.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것은 인간을 신화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격화한 신(神)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계는 이 사실적인 인물 조상이 조상 숭배의 우상이라고 해석했다. 또 하나 뉴허량 여신묘에서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 등 ‘최소한’ 세 명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정리됐다. 여신의 지위가 최소한 3등급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중국 학계는 ‘사람 크기 3배의 여신’이 주신(主神)이며, 이 주신을 다른 여신들이 호위하고 있는 형태라고 봐요. 이것은 조상 숭배의 대상도 굉장히 고차원적인 단계로 넘어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하지만 조상 숭배만이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뉴허량 유적군은 이른바 제단·신전·무덤 등 이른바 단(壇)·묘(廟)·총(塚) 등이 3위 일체로 구성됐다. 제단과 무덤이 한꺼번에 조성된 적석총(제2지점)에서뿐 아니라 그곳에서 900m 떨어진 여신묘에서도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적석총+제단(2지점)’에서는 그곳에 묻힌 씨족의 조상에게 주로 참배하고, 여신묘에서는 요즘의 시제 같은 큰 제사를 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여신묘에서는 여러 씨족의 공동 조상 한 분을 모셨을 수 있죠.”(이교수)
이교수는 “제단과 여신묘를 보면 훙산인들의 조상 숭배가 얼마나 지극한지를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효(孝)사상의 원형이며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모신에 대한 신앙이다. 제사유적인 둥산쭈이에서 나온 잉부(孕婦)상과 뉴허량 여신 모두 여성임을 잊지 말자.
“고대사회에서는 여성이 생육과 대지를 상징합니다. 지모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농사를 지을 노동력을 상징)을 기원했어요. 이것은 농경 및 정착생활로 접어든 신석기인들로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핵심적인 요소는 뉴허량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나온 곰뼈와 곰형 옥기 등의 존재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熊女)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웅녀는 바로 훙산인들이 모셨던 지모신의 원형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의 통로를 이은 이는?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여신묘에서 조상과 하늘을 함께 모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광즈(張光直)의 말을 들어보자.
“훗날 상나라(商·훙산인들의 후예) 때는 왕이 큰 일을 행할 때 무인(巫人)이 하늘과 교통하면서 복점을 쳐서 조상의 하명을 받았다.”
이것은 조상숭배와 하늘숭배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쑤빙치(蘇秉琦)도 “뉴허량 유적군의 단·묘·총의 결합으로 볼 때 고대의 제왕들이 거행했던 교(郊:야외에서 지내는 제사)·료(燎·하늘신에게 제사), 그리고 체(조상신에게 제사)가 함께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또 하나 여신묘에 숨겨진 비밀을 들춰보면…. 바로 여신묘가 상당히 좁다는 것이다. 궈다순(郭大順)은 “여신묘의 총 면적이 10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좁디좁은 면적에 몇 명의 여신들이 모셔져 있었고, 곰이빨 같은 것이 상징하는 동물신들이 포함돼 있다. 좁은 면적에 비해 너무도 풍부하고 방대한 유물의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엄청난 함의를 품고 있다. 이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의 특권층이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단 한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신묘에서 혼자 들어가 제사를 지낸 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제정일치 사회의 왕(王)일 수도 있지요.”(이교수)
옛날 황제(黃帝)의 뒤를 이은 전욱이 신하 중여(重黎)를 시켜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렸다(絶地天通)’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누구나 하늘과의 통로로 왕래했는데, 황제 때 치우가 통로를 통해 황제에게 도전했다는 것. 그러자 황제의 후계자 전욱이 신과 인간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지었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는 바로 이런 고사(故事)가 뉴허량 여신묘와 훙산문화 영역에서 쏟아지는 다량의 옥기와 부합되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끊어진 하늘과 땅의 통로는 누가 잇는가. 그것은 바로 천지를 농단한 전욱과 같은 왕의 고유권한이라는 뜻이다.
#종묘의 원형


훙산인의 성지인 뉴허량 여신묘의 상상도.1m가량 땅을 파 조성한 반지하식 구조로 신석기시대의 취락구조와 비슷하다.
뉴허량 여신묘는 지상 건축물이 아니라 90㎝~1m가량 땅을 파고 조성한 반지하식 건축구조로 돼 있다. 이것은 당대(신석기시대) 취락구조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뜻이다. 인간이 살았던 주거지와 사당(신묘)의 구조가 같다는 것은 인간이 살았던 곳이, 바로 ‘신이 살았던 곳(神居之所)’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신의 인격화라 할까. 여신의 사실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죠.”
그러나 주거지의 기본 구조는 같을지언정 건축물의 배치구조는 사뭇 다르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실이 있고 측실이 있고 전후실이 있는 등 나름대로는 주부(主副) 관계가 뚜렷하고, 좌우 대칭, 전후 호응의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중국 학계가 바로 이것을 후대 종묘(宗廟)의 원형이라 판단하는 겁니다. 일반 주거지와는 다른 후대의 전당(殿堂)과 종묘 배치의 물꼬를 튼 것으로 본거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인 ‘이아(爾雅)’의 ‘석궁(釋宮)’편은 “신묘(사당)는 동서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해놓았는데, 바로 뉴허량의 여신묘 구조와 부합된다. 종묘(宗廟)는 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부계 씨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시작되었으리라.
#훙산인의 성도(聖都)

기자는 여신묘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기면 벗길수록 점점 빠져들었다. 이형구 교수가 한가지 수수께끼를 냈다. “왜, 이 뉴허량 인근에서는 훙산인들이 살았던 주거지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듣고보니 그랬다.
“무덤과 제단, 신전 등 단·묘·총 3위 일체로 갖춰졌는데 뉴허량 유적군을 기준으로 100만㎡ 이내에서 어떤 주거지 유적도 확인하지 못했거든.”
중국 학계는 고민 끝에 해답을 풀었다. 즉 뉴허량은 명실상부한 종묘의 원형이며,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사의 중심지였다는 것. 이는 한 씨족과 부락 단위를 넘어선 단계라는 것. 즉 이 뉴허량은 훙산문화 공동체가 더불어 사용했으며, 그들이 함께 숭배한 선조들의 성지였다는 것이다.
“훙산문화 공동체가 신성시했던 곳이니 그 주변에 주거지를 세우지 못했겠지. 생각해보면 아주 상식적인 답이죠.”
장광즈는 “상나라 때는 종묘가 중심이 된 성도(聖都)와 사람들이 살았던 속도(俗都)의 구별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게 쑤빙치의 견해이고 보면, 뉴허량은 곧 훙산인들의 성도(聖都)였던 것이다.
결국 쑤빙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 학계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뉴허량 여신은 5500년 전 훙산인들이 진짜 사람을 토대로 만든 신상이지, 후세 사람들이 상상해서 창조한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훙산인의 여자 조상이며,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이다.”(중국문물보·1989년 5월12일자)
그러나 쑤빙치 스스로도 인정했듯 발해문명을 꽃피운 훙산문화는 동이의 문화이다. 기자가 만난 쉬쯔펑(徐子峰) 츠펑대 교수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왕권국가였고,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은 복합적인 신권국가였던 것 같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쉬쯔펑은 이어 “황허문명과 랴오허 문명은 훗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바로 양대 문명의 충돌이자 습합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형구 교수의 한 마디.
“발해문명의 창시자인 동이의 족적은 엄청납니다. 이 훙산문화는 사방으로 퍼져 발해문명을 꽃피웠고, 남으로는 중원의 황허문명과 만나 드디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것이 훗날 상나라가 되는 거고….”
〈뉴허량·선양|이기환선임기자〉
“이제 우리 여신(女神)님 보러 가야지.” 7월30일.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적석총 및 제단(제2지점)을 탐사하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농을 건다. 여신묘(뉴허량 제1지점)를 ‘친견’할 시간이다. 유적 바로 곁을 지나는 베이징~차오양 간 공도(公道)를 무단횡단해서 북쪽 산길로 향했다. 여신묘로 향하는 길은 몸단장이 한창이다. 길가엔 도로용 석재들이 쌓여 있고, 인부들이 그 석재를 깔아 길을 만들고 있다.



#세계유산 등재 위해
“중국 정부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사전작업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중국 정부가 발해문명의 꽃을 피운 훙산문화의 본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 20분 정도 산길을 걸으니 저편 숲 속에 허름한 건물 두 채가 보인다. 건물 한 채 한쪽에는 늙수그레한 관리인이 열심히 숫돌을 갈면서 이방인의 방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신묘를 보호하는 다른 가건물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다른 방문객 같으면 콧방귀도 안뀔 관리인이지만 ‘얼굴이 명함’인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뭐라 한 마디하자 군말 없이 문을 따준다. 철커덕!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자마자 기자는 어두컴컴한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훌쩍 뛰어넘은 듯했다. 5000여년 전 여신의 세계로….
#동방의 비너스
“왜, 중국에는 선사시대 인물조각상이 없을까.”


동방의 여신상이 출토된 뉴허량 제1지점 여신묘. 여신상과 함께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와 곰(熊)뼈 등이 출토되어 우리 민족과 강한 친연성을 감지할 수 있다. 뉴허량/김문석기자
3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학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국학계가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의문점이었다. 서양에서는 찬란한 인물 조각 예술이 꽃을 피웠는데, 왜 중국에서는 비너스와 같은 조각품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국의 인체 조각 예술은 모두 외래 요소만을 담은 것일까.
그런데 1979년 중국학계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기화(奇貨)’가 발견됐다.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랴오닝성 카줘(喀左)현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드디어 인체조각상 조각편을 발견한 것이다. 유적의 남쪽은 원형, 북쪽은 방형이었으며 양날개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함께 확인된 유물들은 지(之)자형 빗살무늬토기 채도통형관(밑이 없는 토기)과 삼족소배(三足小杯·세발 달린 작은 잔) 등이었다. 이 유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용기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원형 석축지에서 나온 인물조각상과 임신부 모습의 소조상이다. 두 점의 ‘도소잉부상(陶塑孕婦像)’은 머리부분과 왼쪽 어깨가 이미 없어진 채 발견됐지만, 다리는 남아있었고, 몸의 형태는 확실했다. 하나는 잔존 높이가 7.9㎝였고 몸은 긴 편이었으며, 나머지 한 점은 잔존 높이가 5.8㎝였고 좀 뚱뚱했다.


발굴직후 속살을 드러낸 여신묘 조사현장.
이 임신부 인형 말고도 다른 인체 조각상이 확인되었는데, 인체의 상부와 대퇴부 등의 남아 있는 높이는 18㎝, 두께는 22㎝였다. 남은 조각들을 끼워맞추니 실제 사람의 3분의 1 정도 되었다. 잉부상은 나체였으며, 비록 목 부분은 없어졌지만 당대 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웅변해주었다. 소조 수법이라든지 손과 발 등 세부의 처리가 간단하지만 형체의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고 인체 비례가 완벽하다.
“굉장히 육감적이죠. 소아시아에서 출토된 소형 임신부상은 여성적인 특징만 강조하고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추상화했는데, 둥산쭈이 출토 잉부(孕婦)상은 사실성이 강한 작품입니다.”(이형구 교수)


뉴허량에서 가까운 둥산쭈이 제사유적에서 나온 임신한 여인의 조각상. 동방의 비너스라 일컬어진다.
학자들은 “중국의 비너스(維納斯)”라고 치켜세웠다. 중국학계는 “훙산시대는 문화교류가 빈번했고, 사회가 격렬한 변혁기였다”면서 “잉부상은 모계사회 출현의 단적인 예이며, 5000년 전 원시문명의 증거”라고 해석했다. 둥산쭈이 유적연대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지금부터 5485±110년이었다. 4년 뒤인 1983년 7월, 내로라하는 중국 학자들이 차오양(朝陽)에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둥산쭈이 조사 성과에 대한 모종의 결론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둥산쭈이가 중국 최초의 제사유적이라는 것이었어요. 이곳에서 불에 탄 흙(홍소토)의 잔존덩어리가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神)이 살았던 곳이라는 추정도 함께 했고….”
#동방의 여신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1년3개월 뒤인 1984년 10월31일 오전. 둥산쭈이에서 멀지 않은 뉴허량 제1지점에서 5500~5000년 전 여신의 자태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당시 발굴단의 일원이었던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보듯 당시의 벅찬 감격을 풀어헤친다.
“뉴허량 유적(제1지점) 발굴 현장은 폭풍전야 같았다. 발굴단의 꽃삽소리만 사각사각 났다. 모두 발굴이 이어질수록 ‘뭔가 큰 것이 걸리겠구나’하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에 휩싸여 입을 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주실(主室)의 서측, 바로 그곳에서 중국고고학사에 빛나는 발견이 일어난 것이다.


뉴허량에서 확인된 동방의 여신.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의 원형은 아닐까.

“한덩어리의 진흙덩어리가 떨어졌는데, 거기서 사람 머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흙을 살살 지워보니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이마와 눈이 노출되었다.”
마침내 여신이 현현(顯現)한 것이다. 난리가 났다. 일순 사람들이 쏟아져오고, 촬영기사가 미친 듯 그 발굴 현장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5000년 이상 긴 잠에 빠져 있던 여신이 마침내 부끄러운 듯 기지개를 켠 것이다. 머리상의 잔존 크기는 높이 22.5㎝, 폭(귀에서 귀) 23.5㎝, 미간의 넓이 3㎝, 코 길이 4.5㎝, 귀의 길이 7.5㎝, 입 4.5㎝ 였다.
“영락없는 여인의 자태였어요. 왼쪽 귀를 뚫은 흔적이 있고, 입술엔 붉은 칠(朱漆)이 남아있고, 가슴과 궁둥이, 팔, 다리 등을 조합해보니….”(이형구 교수)
귀가 작고 섬세하며 얼굴 표면이 둥근데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고 머리 위에 테를 두른 모습하고는…. 조각기법 또한 빼어났다. 가장 어렵다는 원조(圓雕)기법을 사용했다. 아마도 당대 최고의 장인이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제작은 크게 4단계를 거쳤다. 먼저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풀 같은 식물로 둘러싸맸다. 둘째, 재료는 깨끗하고 치밀하며 점성이 크고 붉은 진흙을 사용했으며, 셋째 조형단계는 처음엔 거친 흙을 골조 위에 붙인 뒤 광택을 냈다. 그림을 그리고 상감하는 작업은 돌출 부위를 강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눈을 청록색 보석으로 박아놓았다는 게 특이했다. 문제는 여신의 인종을 확정하는 것. 학계는 여러가지 특징으로 미루어 ‘몽골 인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얼굴이 방원(方圓)형의 형태로 납작하고 광대뼈가 나왔고, 눈은 비스듬히 섰고, 콧잔등은 낮고 짧고, 콧날과 콧날개는 원두형(圓頭型)이고…. 전형적인 몽골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이형구 교수)
여기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오해 한가지. 몽골 인종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몽골 인종이라 함은 지금의 몽골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넓은 의미의 ‘동양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인종학상으로 몽골 인종(Mongoloid)란 말은 마르코폴로가 1271~1295년 사이 원나라에서 체류하고 돌아간 뒤 구술한 ‘동방견문록’에서 처음 나왔다. 마르코폴로는 그때 황인종, 즉 동양의 모든 인종을 몽골 인종이라 했다. 지금의 몽골인을 콕 찍어 지칭한 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뉴허량 여신은 한 분이 아니었다. 여신의 머리상이 발견되기 전까지도 67점의 진흙조각편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단은 당시 대략 3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다. 먼저 주실의 중앙에서 확인된 코의 잔해와 큰 귀 등을 검토한 결과 이 여신의 크기는 사람의 3배에 달했다. 또한 서측실의 손목과 다리를 분석한 결과 사람의 2배 크기였으며, 주실에서 발견된 어깨, 유방, 왼쪽 손등을 검토하니 등신대의 형태였다.
그런 가운데 바로 사람의 크기와 비슷한 여신의 머리상이 출토되면서 등신대의 여신이 어느 정도 조립된 것이다. 결국 이 여신묘에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라는 최소한 세 사람의 여신을 모셨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최소한’ 3명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다. 흩어진 잔해로 봐서는 더 많은 여신들을 모셨을 수 있다. 이것은 여신도 최소한 3개 등급, 아니 그 이상으로도 나눌 수 있다는 얘기다.
중앙부의 여신(사람 크기 3배)은 주신(主神)이며, 다른 여신들(사람 크기의 2배, 등신대, 그리고 나머지)은 그 주신을 모시는 군신(群神)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웅녀의 환생?
여신묘에서는 여신상 말고도 제사유적임을 나타내는 다른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유적의 총 규모는 총 4만㎡에 이른다. 특히 여신묘 주변에 있는 저장용 구덩이에서는 지(之)자문 빗살무늬토기 통형관(밑 없는 토기)과 소구관(小口罐·입이 작은 토기), 주발 등 다양한 토기와 사슴·양뼈 등 많은 동물뼈가 나왔다.

또한 다른 구덩이에서는 100점 이상의 통형관이 쏟아졌다. 이뿐이 아니다. 여신묘의 벽체 파편에는 회(回)자 무늬 도안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대형 향로뚜껑을 비롯한 각종 제사용기들도 심상치 않은 여신묘의 위상을 전해준다. 또 하나, 이미 언급했듯(경향신문 12월22일자) 진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잇달아 확인되었는데, 중국학계가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주실과 곰(熊)이라고 단정했다.
원래는 용머리(龍頭)로 판단됐지만, 납작하고 둥근형의 입,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 발가락 4개 등 종합적으로 볼 때 곰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웅녀의 환생 아닌가. 과연 5000년 이상 잠자던 여신의 부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근에 집중된 적석총과 제단, 그리고 이곳 여신묘가 주는 함축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
단군신화까지 훔쳐가려는 중국


“이 옥기에는 참 많은 뜻이 담겨 있어요.”
지난 7월30일 랴오닝성 박물관. 이른바 ‘랴오허(遼河) 문명’ 특별전을 지켜보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기자를 붙든다. 뉴허량(牛河梁) 16지점 3호 무덤에서 확인된 짐승머리형 옥기를 가리킨 것이다. 짐승머리 형태로 3개의 구멍이 뚫린 희한한 모양이다.

뉴허량 16지점에서 확인된 곰형 옥기. 곰 두마리가 양쪽 끝에 원조(圓雕) 기법으로 조각됐다. 훙산문화 옥기예술의 정수라는 평이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이기자가 보기엔 무슨 동물 같아요?”
“쌍웅수삼공기(雙熊首三孔器)라고 했으니 응당 두마리의 곰과 3개의 구멍이 뚫린 옥기라는 뜻이겠죠.”
유물 설명에 나온 대로 대답할 수밖에.
“그동안엔 돼지머리로 보아 저수삼공기(猪首三孔器)라 했거든. 그런데 최근들어 해석이 바뀐거지. 돼지에서 곰으로….”
곰의 정체는?


뉴허량에서 출토된 진흙으로 만든 곰 발 조소상.
자세히 보았다. 매우 사실적인 기법이다. 짧지만 둥근 귀와 눈, 모가 났으면서도 둥근 이마, 뾰족하면서도 둥근 입, 얇고 벌어진 아랫입술…. 그러고보니 영락없는 곰의 모습이다. 기자는 순간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다. 곰(熊)이라.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본거지에서 곰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곰은 바로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이뿐이 아니라, 발해문명의 영역에서 곰 관련 옥기와 곰뼈가 잇달아 쏟아졌어요. 그러니 중국학계가 비상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원래 곰은 중국학계의 관심 밖이었다. ‘용의 자손’이라는 믿음 때문에 용(하늘과 물을 상징)이 추앙되었고, 또한 농경생활과 관계가 깊은 돼지가 의미 있는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된 옥룡들의 원형은 돼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그럴듯한 학설이었다.
사실 옥으로 만든 용 조각품을 본다면 그 형태를 대략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C자형과 결형(한쪽이 트인 고리모양의 패옥)이다. C자형 가운데는 네이멍구 싼싱타라(三星他拉)에서 출토된 크기 26㎝ 짜리 옥룡이 가장 유명하다. 이 C자형 옥룡이 정말 용이 맞는지 그조차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오고, 머리와 등 뒤의 장식이 돼지가 아니라 사슴뿔이라는 설도 난무하는 등 복잡하다.
그러나 요즘엔 이 C자형 옥룡의 원형은 돼지 혹은 사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결형 옥’은 그 원형이 곰(熊)이라는 설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 여러분이라면 간파할 수 있으리라. 즉 이 결형 옥이 훙산문화의 전신인 차하이(사해·査海)-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전)에서 확인된 옥결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최근 한반도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도 차하이-싱룽와와 같은 시대(BC 6000년전)의 옥결이 출토되었음을….
여하튼 중국학계는 뉴허량에서 나온 결형 옥의 원형을 예전에는 돼지로 보았지만, 요즘엔 곰으로 보고 있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잇달아 출토된 곰뼈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즉, 뉴허량 2지점 4호총 적석총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곰아래턱 뼈가 나왔다. 이뿐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뉴허량 여신묘에서 나온 진흙으로 만든 동물 가운데는 두 개체의 짐승류가 확인됐다. 발굴단은 처음엔 이 동물이 으레 돼지이겠거니 했다. 출토 사실을 보도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주둥이는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이 있고~ 상하 턱 사이에는 입술 밖으로 긴 이가 노출돼있고, 앞니 역시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봤다면 돼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두 마리의 동물은 비교적 긴 아래턱과 길면서 구부러진 이빨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곰의 특성에 가까웠다.”(궈다순의 회고)
특히나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확인된 동물의 양발은 영락없는 곰의 발이었다. 네 발톱이 이렇게 노출된 동물은 곰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결국 뉴허량 여신묘에서 확인된 두 마리 짐승은 모두 곰이었던 것이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확인된 쌍웅수삼공기와 곰뼈, 그리고 바로 곁 여신묘에서 확인된 진흙으로 만든 곰 형상….
곰을 숭배한 훙산인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고 하니 훙산인들이 곰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샤오허옌 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네이멍구 우한치(敖漢旗) 바이스랑 잉쯔(白斯郞 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애초엔 ‘개머리 장식’이라고 보고되었지만, 넓은 이마와 뾰족한 주둥이, 짧은 두 귀, 그리고 머리에 비해 굉장히 넓은 목 부분은 전형적인 곰의 머리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일컬어진다.
“이렇듯 옥으로 조각한 웅룡(熊龍)은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은데 한 20여건이라고 보고됐어요. 웅룡은 말굽형 베개, 구름형 옥패, 방원형 옥벽(玉璧) 등과 함께 훙산문화 옥기의 4대 유형 중 하나로 꼽혀요.”(이형구 교수)
웅룡은 뉴허량뿐 아니라 츠펑 우한치, 시라무륜(西拉木倫) 강 이북의 바린여우치(巴林右旗)와 바린쭤치(巴林左旗), 허베이성(河北省)의 웨이창(圍場)현 등 폭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웅룡은 죽은 자의 가슴팍에 주로 놓여 있었는데(뉴허량 제2지점 1호총에서 보듯),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었던 것이다. 이 옥으로 만든 웅룡은 후대에까지 폭넓게 퍼졌는데, 허베이성 양위안(陽原)현 장자량(姜家梁)과 허난성 상춘링(上村嶺)의 괵국(서주 후기의 소국) 묘지에서도 웅룡 옥조각이 나온다. 또한 량저우(良渚)문화 옥기에서 보이는 신인(神人)의 발톱도 곰의 발톱으로 밝혀졌다.
훙산인의 후예가 분명한 상나라에도 훙산문화 옥조각 웅룡의 전통은 당연히 이어졌다. 상나라 유적인 안양(安陽) 인쉬(殷墟)에서도 훙산문화와 유사한 결형 옥이 확인된다는 게 중국학계의 해석이다. 이처럼 뉴허량 등지에서 확인되는 심상치 않은 곰의 흔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궈다순의 해석을 보자.
“훙산인이 숭배한 동물신은 여러 신(神) 가운데 으뜸인 주신(主神)이었을 것이고, 훙산인은 바로 곰을 숭배한 족속이었다.”
곰이 황제라고?
이렇듯 뜻밖에 출현하는 곰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리스(李實)였다. 그는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되는 곰의 흔적을 보고, “훙산인들은 곰을 숭배했고,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사에 기록된 ‘유웅씨(有熊氏)’”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학계는 리스의 주장에 주목하여 훙산문화의 곰을 황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켰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발해연안에서 곰의 흔적이 쏟아지니 중국학계는 어쩔 수 없었어요. 견강부회할 수밖에….”(이교수)
‘황제가 곰(熊)족’이라는 기록은 사실 궁색하기 이를 때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제를 유웅씨라 불렀다(又號有熊氏)”는 기록이 있고, 서진(西晋·AD 265~316년) 때 학자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황제는 유웅이다(黃帝爲有熊)”라고 표현돼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관련 기록은 사기 오제본기에 나왔다.
“황제가 염제와의 싸움에 곰(熊), 큰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 ·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염제와 싸웠다.”
중국학자들은 황제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고 있는 족속들을 이끌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북방민족과 수렵민족의 색채가 짙다”(궈다순)고까지 표현한다. 더 나아가 저명한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는 “황제시대의 활동중심은 훙산문화의 시공과 상응한다”고까지 했다. 이 말은 ‘황제가 훙산인의 왕이었다’는 소리다.
단군신화의 원형


동이의 본향 차하이에서 확인된 옥결.
하지만 억지춘향도 유분수지. 곰 숭배는 중국보다는 동북아시아 종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다. 그 중의 대표격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중국 역사서에서 황제와 곰의 기록은 빈약하기 이를 때 없지만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를 보라.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풍백과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모든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범과 곰이 한마리씩 같이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환웅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는 이걸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라 했다. 곰과 범은 삼칠일간(21일간) 조심했으나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지만,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다. ~(사람이 된) 웅녀(熊女)가~ 단수(壇樹) 밑에서 임신을 빌었더니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혼인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 왕검이다.”


차하이와 싱룽와, 그리고 한반도 고성 문암리에서 확인된 옥결이 훙산시대엔 이렇게 곰형 옥으로 발전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스토리 구조인가.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의 말처럼 “몇 자 안되는 단편의 기록(중국측)과, 기·승·전·결이 완벽하고 제국의 흥망성쇠가 담겨있는 단군신화”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황제=곰 숭배=훙산문화의 주인공’이라 단정하려는 중국학계의 몸부림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기자의 상상력은 한도 끝도 없다. 그렇다면 인근 적석총에서 곰뼈와 옥웅·옥룡이 나왔고, 진흙으로 만든 곰형상이 확인된 뉴허량의 여신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여신묘에서 확인된 여신상은 과연 누구일까.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熊女)의 원형은 아닐까.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옥기 쥔 巫人은 神과 소통한 왕” 1989년 가을.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제2지점 1호 적석총을 발굴 중이던 조사단은 기이한 모습에 꿈을 꾸는 듯했다.
21호묘에서 무려 20점의 옥기가 쏟아진 것이다. 이것은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무덤 한 곳에서 나온 가장 많은 옥기였다. 무덤에는 옥기로 도배하다시피한 성인 남성이 누워 있었다. 입을 활짝 벌린 채 반듯이 누워 있는 인골은 짐승 얼굴 모양의 옥패(玉牌), 옥거북이, 옥베개 등으로 잔뜩 치장했다.



-옥으로 도배한 인골-

뉴허량 제1지점 중심대묘에서 확인된 인골. 양손에 옥거북이를 쥐고 있는 것을 비롯, 7점의 옥기만 부장돼 있다. 일인독존의 무인(巫人)으로 추정된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희한했다. 다른 부장품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선사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 같은 것들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중국학계는 이런 기이한 장례 풍습을 두고 ‘유옥위장(唯玉爲葬)’, 즉 옥으로만 장례를 치렀다고 정리했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정식 발굴을 끝낸 적석총은 모두 4곳에 이른다. 탐사단이 서 있는 이곳 제2지점과, 3지점, 5지점, 16지점이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발굴을 끝낸 묘장은 모두 61기인데, 그 가운데 부장묘(副葬墓)는 31기이다. 그런데 이 31기 중 옥기만 넣은 묘는 26기에 이른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부장묘의 83.9%가 ‘유옥위장’의 훙산문화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제2지점만 보죠. 26기의 석관묘가 묻힌 1호 적석총의 경우 옥기로만 장례를 지낸 것이 14기에 이릅니다. 부장품이 없는 묘가 11기이니 부장묘=옥기묘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거죠.”(이형구 선문대 교수)
비단 뉴허량의 옥기묘뿐만 아니다. 이곳에서 200㎞ 동쪽으로 떨어진 후터우거우(胡頭溝·랴오닝성 후신) 유적과, 바이인창한(白音長漢·네이멍구 린시), 난타이쯔(南台子·네이멍구 커스커텅치)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옥기묘가 출현했다. 예컨대 후터우거우 적석총에서는 10점의 옥기가 출토되었고 토기는 없었다. 이 후터우거우 유적 훙산문화 문화층의 바로 위에서 한반도 및 발해 연안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비파형청동단검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양손에 꼭 쥔 옥거북이-

뉴허량에서 확인된 다양한 옥기들. 봉황과 쌍가락지·구름형·짐승얼굴형 옥장신구와 옥기는 물론 하늘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한 무인(巫人)을 상징한 옥기가 쏟아졌다. (위로부터)
뉴허량 옥기묘의 모습을 다시 재현해보자. 탐사단이 서있는 제2지점에는 앞서 살펴본 1호 적석총 21호묘 말고도 4호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었다. 역시 3점의 옥기가 부장돼 있었다. 말발굽형 베개 1점이 머리 위에 놓여 있었고, 가슴팍에는 옥룡이 있었다. 묘 주인은 뭔가 특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제5지점과 16지점에서 확인된 인골과 옥기를 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제5지점의 중심대묘에서는 노년 남성 1구의 인골과 7점의 옥기가 출토됐다. 양 귀에 옥벽(玉璧), 즉 둥근 옥이 양 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가슴팍엔 구름형 옥장식이 놓여 있다. 또한 그 아래 말발굽형 옥기가 있으며, 오른팔엔 옥팔찌가 놓여 있다. 무엇보다 양손에 옥거북이가 쥐어져 있다는 게 재미 있다. 조사단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무인(巫人·요즘의 무당과는 다른 차원이다)’이라고 추정했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제16지점의 중심대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었다. 이 묘의 주인공도 5지점 중심대묘와 마찬가지로 신(神)과 소통할 권리를 독점한 무인(巫人)일 것 같다. 특히 이곳에서는 옥으로 만든 무인인형과 봉황이 특징적이다.
나중에 랴오닝성 박물관을 들른 기자는 잘 복원하여 전시해놓은 뉴허량 무덤들을 보며 흐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미 죽었는 데도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으로 거북이까지 만들어 양손에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참….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재미 있기도 해서…. 더군다나 묘의 주인공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무인이라지 않는가. 하기야 죽어서도 죽지 않으려는 사람의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려니….
-신과 소통하는 도구-
왜 옥인가. 훙산문화의 주인공들은 왜 그토록 옥에 집착했을까.
“갑골문자의 ‘예(禮)’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자 위에 두 개의 옥을 올려 놓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禮자 가운데 오른쪽 豊자를 보라.) 그것은 곧 신을 섬기는 일이었다.”
저명한 고증학자인 왕궈웨이(왕국유·王國維·1877~1927년)의 말이다. 옥이 범상치 않은 신물(神物)임을 잘 파악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옥을 숭상하는 나라였다. ‘예기(禮記)’는 “자고로 군자는 반드시 패옥을 찬다”고 기록했다. 선사인들은 하늘 운행의 궤적에 있는 태양을 관찰하고 둥근 옥벽(玉璧)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하늘과 태양을 숭배했다. 또한 땅을 사각형으로 생각하고 옥종(玉琮·사각형 형태의 옥)을 만들어 땅에 제사를 지냈다. 중요한 것은 석기와 토기 같은 것들은 생활용품들이지만 옥기는 관념 형태의 창작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생명은 하늘이 부여하는 것이며, 신령한 동물과 산수, 토지 등은 서로 영물처럼 치환된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제기에 신비로운 문양과 부호, 상형문자 등을 깎아넣은 것이다. 씨족부락은 각종 동물 옥장식으로 제사에 쓰이는 신기(神器)와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을 만들었고, 씨족사회의 번성과 풍성한 수확을 바랐다. 훙산인들은 정신문화 범주에 속하는 옥을 무덤에 도배하는 장례 풍속으로 물질문화를 배척하고, 정신문화를 중시하는 사유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巫人과 옥과 하늘-
여기서 (뉴허량의 무덤에서 보이는 것 같은) 무인(巫人)이 등장한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說文)’이 ‘옥(玉)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자.
“영(靈)자는 밑의 무(巫)가 옥으로(가운데 입 口자 3개) 신과 소통한다(以玉通神)는 뜻이다.”
머우융캉(牟永抗)·우루쭤(吳汝祚) 등 중국 학자들은 “무(巫)는 인간과 신의 왕래자”라고 해석했다. 인간의 대표이면서 신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인인 것이다. 여기서 옥은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다.
“금은 변하지만 옥은 변하지 않죠. 그런 뜻에서 옥은 영생불멸과 영원한 사랑을 뜻합니다. 여인들이 왜 옥을 그리 귀하게 여겼겠어요.”(이형구 교수)
무인은 신과 소통을 통해 옥을 독점하고, 또 옥을 통해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결국 무인(巫人)과 하늘(神)과 옥(玉)은 삼위일체인 셈이다.
그런데 무인은 옥을 제작하는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특권을 농단하고 천지를 관통하는 능력을 보였으며, 하늘과 땅의 경지를 아는 지자(智者)로 우뚝 섰다. ‘옥으로 신에게 보인다(以玉示神)’는 옛말이 바로 그것이며, 그 주인공은 바로 무인이라는 말이다.
뉴허량 등 훙산문화 본거지에서 보이는 ‘옥 도배 무덤’을 다시 보자. 많은 적석총 가운데서도 우뚝 서 있는 중심대묘의 옥기는 수량과 질의 측면에서도 다른 무덤들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앞서 기자는 옥거북이를 양손에 쥐고 있는 인골을 두고 “죽어서도 영원히 살려는 모습이 다소 애처롭다”고 비아냥댔는데, 그것은 아주 천박한 해석일지 모른다. 궈다순 등 중국 학자들의 해석은 사뭇 진지하다.
“고인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신과 통하는 권력임을 체현하고 있다. 고인이 묻힌 중심대묘는 중소형 무덤들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거대한 방형 혹은 원형의 적석총으로 돼 있다. 옥거북이를 쥔 주인공인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즉 이 중심대묘의 주인공은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교주이면서, 왕(王)의 신분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정일치 시대의 단적인 모습이다.
-옥으로 덕을 견준다-
이것이 바로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가 장고 끝에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 즉 원시국가 단계에 돌입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훙산문화, 즉 발해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옥 문화는 문명의 단계에서도 의미 있는 획을 그었다.
보통 중국 상고사를 (구·신)석기-청동기-철기 등 3단계로 구분한다. 그런데 여기에 옥(玉)의 시대를 넣어 석기-옥기-청동기-철기 등 4단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미 2000년 전부터 나왔다. 후한 때 원강이 지었다는 월절서(越絶書·춘추전국시대 월국의 흥망을 기록한 책)에 따르면…. 풍호자(風胡子)라는 사람이 초나라 왕에게 치국의 도를 이야기 하면서 옥기시대를 언급했다.
“헌원·신농·혁서의 시대인 돌을 병기로 삼았고(석기), 황제의 시대엔 옥(玉)으로 병기와 신주(神主)를 삼았다. 우임금 때는 청동기를, 그 이후엔 철기를 썼다.”
훙산인들은 ‘옥=인간·자연의 조화’ 관념을 지녔는데, 이 전통은 후대 유학자들의 심금을 사로잡았다.
특히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以玉比德)’(‘예기’ 빙의·聘義편 )고 강조했다. 공자는 재질과 광택, 구조, 소리 등 옥의 자연적인 특성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도덕적 가치에 부여한 것이다.
“옥(玉)이 온유한 것은 인(仁)과 같고, 치밀한 것은 지(知)와 같고, 곧아서 남을 해치지 않은 것은 의(義)이며, 정연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예(禮)를 닮았다. 소리가 청아하고 여운이 끝이지 않는 것은 악(樂)이고, 옥의 티와 좋은 마음을 감출 수 없으니 충(忠)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온유하고 마치 옥과 같이 생겼으니 그래서 군자가 귀한 것이다.”(예기)
적석총과 제단과 여신묘. 그리고 찬란한 옥기 시대. 이형구 교수가 한마디 했다.
“옥기의 출현·제작은 엄청난 의미가 있어요. 옥기를 독점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신분계급이 생기고, 전문화·분업화가 이뤄지고…. 하늘과 소통하는 독점자가 고국을 통치하는 이른바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뜻합니다. 그걸 동이족이 창조해낸 겁니다.”
그런데 이쯤해서 소름 돋는 한가지. 뉴허량 등 훙산문화에서 출현한 곰(熊) 모양의 옥과 곰의 뼈다. 과연 이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 기자〉
“돌무덤이 고인돌로 발전했을 것” 혹 맹목적인 순혈·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우리 것’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우리 문화의 원류와 정체성을 찾는 것이 단순한 피가름이 아니다. 한민족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종족으로 이뤄졌다면 그 여러 종족이 힘을 모아 이뤄낸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는 것 역시 뜻깊은 일이다.
-외줄타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여전히 식민·분단·냉전사학은 떠도는 원혼처럼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북한·중국·러시아 등 우리 역사의 중요한 무대에 대한 현장 조사가 시작된 것은 20년도 되지 않았다. 이형구 교수처럼 일찍이 한·중 수교 이전에 중국 본토의 역사와 고고학을 공부한 이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가운데 중국은 동북공정, 하·상·대 단대공정, 중국문명 탐원 공정 등 장기 프로젝트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이형구 교수가 뉴허량 2지점에 조성된 석관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왼쪽) 이교수는 이런 석관묘가 훗날 고인돌 무덤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뉴허량·선양/김문석 기자
역사왜곡의 주범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단적인 예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못해 AD 0~300년 사이의 역사를 ‘원삼국시대’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둔갑시킨 지 어언 40년 되지 않은가. 그런 마당에 “남의 땅(중국·러시아)에서 우리 것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폄훼한다면 지나친 냉소·허무주의가 아닐까.



“우리 것이라고 굳이 주장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쓰면 됩니다.”
기자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는 이렇게 끝났다. 탐사 내내 지나친 민족주의와, 우리 문화의 원류 및 정체성 탐구를 사이에 두고 벌였던 끊임없는 마음 속 갈등. 뉴허량(우하량·牛河梁)의 대형 피라미드와 적석총군을 직접 보면서 외줄타기의 갈등을 이렇게 확실하게 정리했다.
-랴오허 동쪽과 서쪽-

뉴허량 2지점 무덤 주위에는 토기들이 정렬돼 있다.

적석총·피라미드와 함께 또 하나의 단서는 무덤 주변을 빙 둘러서 꽂아놓은 통형관(밑이 없는 토기) 행렬. 모종의 장례 습속이 분명한 이 행렬은 훗날 한반도 전남지방에서 그대로 보이며, 일본 열도의 하니와(埴輪)로도 연결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덤은 라오닝성 푸신(阜新) 후터우거우(호두구·胡頭溝)에서도 확인됐다. 이 또한 의미심장했다. 훙산문화 시대(BC 4500~BC 3000년) 위 문화층에서 한반도와 발해연안의 대표 유물인 비파형 청동단검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파형 청동단검을 썼던 사람들이 훙산문화인들의 묘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의미. 이 얼마나 끈질긴 문화적인 연속성과 계승성인가.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끔찍하게 돌무덤을 사랑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직전 중국 정부는 지안(輯安)의 국내성 주변에서만 1만3000여기의 고구려 적석총을 확인했다. 43년이 흐른 지금에도 약 6000기가 남아 있다.
“(장례 때) 고구려는 돌로 쌓아 봉분을 만든다(積石爲封)”(삼국지 위서 동이전)는 기록이 단적인 예다. 그런데 고구려 시대보다 무려 3500년 전에 조성된 엄청난 적석총과 피라미드가 랴오허 동쪽인 랴오둥(요동·遼東)이 아니라 서쪽인 다링허(大凌河) 유역에서 확인됐으니 무슨 조화인가.
“적석총은 그전까지는 랴오허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랴오둥 반도, 그것도 신석기 말~청동기 초기의 무덤이었거든.”
이교수의 말마따나 랴오둥 반도에는 BC 2500~BC 2000년의 돌무덤이 곳곳이 흩어져 있다. 적석총뿐 아니라 석곽묘·석관묘, 그리고 지석묘(고인돌무덤)까지 다양하다. 우선 랴오둥 반도에는 뤼순(旅順)시 라오톄산(老鐵山)과 장쥔산(將軍山)을 비롯해 쓰핑산(四平山)·위자춘(于家村)·바이강쯔(柏崗子)·다타이산(大臺山) 등 이름을 열거하기도 힘든 적석총들이 있다. 이 돌무덤들은 주로 바닷가에 면한 산등성이와 낮은 언덕에 수기 혹은 수십기씩 연속적으로 배열돼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도 같은 형식의 장례풍속이 나온다.
이 가운데 만주침략의 사전 준비에 나선 일본 인류학자 도리이 류코(鳥居龍藏)가 가장 먼저 라오톄산 적석총(1909년)을 발견했다. 적석총 안에서는 여러 개의 석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훗날 발견된 훙산문화 시기의 뉴허량 적석총과 비슷한 구조다.
-대국의 풍모 보인 저우언라이-
또한 인근의 장쥔산 적석총은 1963~65년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단이 발굴했는데, 모두 9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었다. 조·중 합동조사단이라. 이쯤해서 왜 60년대 초중반 조·중 합동조사단이 발족했는지 알아보자.
62년 당시 북한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고 싶다”며 중국 동북지방의 고고학 조사를 요청했다. 저우언라이는 “고조선 기원은 동북지방이 아니라 푸젠(복건·福建)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합동조사는 용인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문헌기록은 대국 쇼비니즘에 빠져 객관성을 결여한 불공정한 기록이 많다”고 중국의 역사왜곡 풍토를 인정한 것이다.
“그래도 당시 중국은 명실상부한 대국의 마인드를 갖췄어요. 열린 마음으로 소수민족의 역사를 인정했으니까….”(이형구 교수)
이에 따라 조·중 합동 고고학발굴대가 구성되어 63년 8월부터 65년 8월까지 동북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에 나섰다.
“조·중 합의는 재미있었어요. 예컨대 유물 2점 이상이 나오면 반씩 나눠 갖기로 하고, 1점만 나오면 북한이 가져가서 연구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어요.”

1960년대 초반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로 확인된 장쥔산 적석총의 그림. 적석총 안에는 9개의 석곽묘가 조성돼있었다.
하지만 조·중 관계는 66년부터 중국 문화대혁명 발발과 함께 모든 학술행위가 중단된 것을 계기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북한이 66년 7월,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 발굴보고서를 공동조사단의 이름으로 내버린 것이다. 고조선의 기원이 중국 동북이고,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내용으로…. 중국의 분노는 극에 달해 그때부터 양국간 학술교류는 빙점에서 맴돌았다.
“물론 북한도 신의를 저버렸다지만, 핵심은 그후 중국이 명실상부한 대국의 면모를 버리고 소아병적인 중화주의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90년대 들어 중국내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화의 역사로 편입시킨 것입니다.”
-4000년 이어진 돌무덤의 전통-
랴오둥 반도의 고고학 조사는 이런 풍상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다. 라오톄산과 장쥔산 외에도 우자춘에서는 58기의 묘실을 담은 엄청난 크기의 적석총이 확인됐다. 어떤 묘실에는 무려 21구의 인골이 매장됐다. 또한 뤼순시 허우무청역(後牧城驛) 강상(崗上)·러우상(樓上) 적석총에서는 23개 혹은 10개의 석관이 중앙의 큰 석관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돼 있었다. 그런데 시기는 다소 늦지만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돌무덤들이 속출한다.

황해도 황주 침촌리 적석총
BC 1500년으로 편년되는 시도(矢島·인천 옹진군)적석총과 황해도 황주의 침촌리 적석총, 그리고 강원도 춘천 천전리 적석총이 그것이다. 이밖에 평북 강계 일원과 대동강 유역, 평남 강서·북창 일대, 재령강 유역의 황해도 봉산·인산·서흥·사리원, 한강유역의 양평, 경남 김해·진주, 충남 아산·예산·부여, 충북 단양 등지에 분포됐다. 돌무덤의 전통은 백제의 서울 석촌동 고분과 공주·부여의 석실묘까지 4000년 이상 이어진다. 이형구 교수의 정리를 들어보자.
“뉴허량 적석총은 BC 3500년으로 편년됩니다. 그리고 랴오둥 반도의 적석총군은 BC 2500~BC 2000년, 한반도의 적석총은 BC 1500년 이하…. 이것은 돌무덤의 원류는 홍산문화이며, 이것이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 반도를 거쳐 한반도~일본 열도로, 지린(吉林)~연해주로, 몽골~시베리아로 건너갔다는 얘기죠.”
-1000년의 공백? 고인돌?-
여기서 기자가 좀처럼 풀 수 없는 두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하나는 랴오허를 기준으로 왜 1000년의 공백이 생기는 것일까. 이형구 교수는 “훙산문화는 다링허(大凌河)와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을 거치는 동안 시간·공간의 과도기를 겪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교수 역시 랴오허를 건너는 동안 생긴 1000년 가까운 공백에 대해서는 “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결론을 유보한다. 뉴허량에서 랴오허를 건너 선양(瀋陽)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갖가지 상념에 젖어 있던 기자가 눈을 떴다.
“저기가 바로 645년 당나라 대군이 궤멸당한 요택(遼澤)이야.”
누군가 소리친 것이다. 과연 대단했다. 수풀이 무성하고 물길이 수없이 뚫린 대습지. “세계 최대의 습지”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가이드는 “다링허~랴오허 삼각주는 무려 14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과연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날 수 없으므로~얼어 죽는 이가 많았고~황제(당태종)가 스스로~일을 도울 정도”(삼국사기 보장왕조)라 할 만했다. 훙산문화 시기에는 더하면 더했겠지. 이런 습지로 극복하고 랴오허를 건너는 일은 엔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 그게 돌무덤의 전파를 늦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기자의 천박한 상상력이다.
또하나 의문점은 지석묘(고인돌 무덤)이다.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3만여기가 분포된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묘제이다. 가히 고인돌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고인돌 전문가 쉬위린(許玉林)은 “고인돌은 BC 200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중국 동북에서는 랴오허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이형구 교수는 조심스럽게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뉴허량의 적석총·석관묘 같은 훙산문화 돌무덤이 랴오둥 반도에서 고인돌로 발전한 게 아닐까요. 석관의 4벽이 높아져 지상으로 올라가고, 그 위에 큰 개석을 덮게 되고…. 하나의 고인돌 무덤이 된 겁니다.”
-고조선의 숨결-
고인돌 무덤을 축조한 랴오둥의 사람들은 분명 고조선 사회의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랴오허 서쪽 츠펑(赤峰)에서 석성을 쌓았던 산줘뎬(三座店)과 청쯔산(城子山) 사람들도 고조선인들일 것이다.(경향신문 10월27일자) 쑤빙치(蘇秉琦)도 “이곳에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같은 시대의 강력한 방국(方國)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들은 대규모 석성과 피라미드를 방불케 하는 돌무덤과 빗살무늬토기, 갈지(之)자무늬 토기, 옥기 등을 공통분모로 발해문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뉴허량|이기환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