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13.

지도로 보는 낙곡대전

PGR21.com

   

2017/12/05 16:46:07
유스티스
http://blog.naver.com/sjkim2090
지도로 보는 낙곡대전
https://pgr21.com/?b=8&n=74854
1. 서
     먼저 이 글은 https://pgr21.com/?b=10&n=317484 링크 글의 댓글에 달린

https://www.google.com/maps/d/viewer?mid=1BO4HBVkJ3lpXbZ3igQBpZiLfPpc

삼국시대 지명을 링크해놓은 지도에 감명받아 중국 삼국시대에서 제가 가장 몰랐었던, 그리고 알게되면서 가장 놀랐던 성과에 대해 같이 나눔하고자 글을 씁니다. 이 글은 정사 삼국지와 그를 풀어놓은 웹상의 많은 문서에서 그 지식을 빌려왔음을 미리 밝힙니다. 그리고 사서의 공식 표현은 [ ] 처리하겠습니다. 번역은 웹상의 문서를 교차검증하여 기재하겠습니다.


2. 제갈량 생전 왕평의 활약 : 대 장합 카운터
1) 등산가와 함께한 나날 : 1차 북벌


qgxT9WR.png

     기산으로 진출한 제갈량은 위에서 진창을 통해 넘어올 기점이 될 가정으로 마속을 파견하며 왕평을 달려 보냅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 저 험지 가정 어딘가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었어야할 마속은 산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먼저] 가정에 왔음에도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이 글의 주인공 왕평은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결국 올라갔고 [나중에] 도착한 장합이 보급을 끊고 마속은 패퇴합니다. 이 후 여러 사서는 왕평에 대해 씁니다.

[가정의 군사들은 모두 무너져 흩어졌으나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 군사가 북을 울리고 자리를 지키니 장합은 복병을 의심하여 접근하지 아니하였다.]

이 전에도 무수한 전과를 쌓아와서 위국에서 그 이름에 위에 놓일 장군이 드문 장합과의 직접적 전투는 아닐지라도 전투 심리전에서 승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2) 장합 죽기 전 또 패배 : 4차 북벌


nr00CLT.png

     다시 기산으로 진출한 제갈량의 4차 북벌은 사마의와의 대결의 승패가 사서상으로 분명하지 않은채로 끝납니다. 이 4차 북벌에서는 제갈량과 사마의, 왕평과 장합의 매치업이 있었는데 하나 명확한건 왕평과 장합의 매치업에서 또 왕평이 그 장합을 이깁니다.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군량 문제로 촉이 퇴각하는 상황에 사마의가 장합으로 하여 추격하게 하고 장합은 죽게 됩니다. 하북에서부터 수많은 전공을 올려 위명이 높던 장합에게 마지막 패배를 안겨준 왕평이었습니다.


3. 제갈량 사후 왕평의 활약 : 촉의 수호신
1) 제갈량 사후 수습

https://pgr21.com/?b=10&n=317484

     위연의 반란을 수습한 왕평입니다. 위 글로 갈음합니다. 요약하자면

[제갈량이 죽어 그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너의 놈들이 감히 이처럼 구느냐!]
라는 일갈로
[위연이 난을 일으키자 한번 싸움으로 패퇴시킨 것은 왕평의 공이었다.]
로 제갈량 사후를 수습합니다.

2) 독한중 왕평 : 촉의 수호신

     왕평은 위연의 난 진압 후 한중에 태수로 있게되고 독한중(한중의 감독 : 사견으로는 도독을 저렇게 부르는게 아닐지.)으로 한중을 지켜 대위 방어선을 지키게 됩니다.


Irq1uIf.png

표시된 3로로 244년 위가 한중을 침공합니다. 기산로로 곽회, 당낙도로 조상과 하후현, 자오도로 하후패가 진격합니다. (다만 하후패의 진격은
다소 설명이 불분명합니다. 하후현이 조상과 출전했으니 하후패도 함께했을 가능성도 있다고도 하고 명확한 진격의 기록이 없기도 하구요. 일단 전투에 큰 기록이 없으니 사실상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 공세의 배경은 위국의 정치상황과도 맞물려 있지만 일단

[위나라의 대장군 조상이 보병과 기병 10여만을 거느리고 한중 일대로 향하였는데 그 선봉이 이미 낙곡에 있었다. 이때 한중을 지키는 병사는 3만이 되지 못하여 여러 장수들은 크게 놀랐다.]

이니 승산 판단에 부족함은 없었겠지요. 이렇게 불리한 수세에 몰린 한중의 제장은


3DTsMlx.png

양평관으로 비의의 성도군이 오고있으니 한성과 낙성에서 수비를 하여 버티자는

[지금 힘이 부족한데 적을 막아야 하니, 마땅히 한성과 낙성을 굳게 지키고 도적(위군)들을 만나면 깊이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성도의 군대가 양평관을 족히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견을 냅니다. 이에 왕평은

[그렇지 않소, 한중에서 성도까지 가면 거의 1천리요. 위군이 만약 양평관을 얻는다면 곧 화가 되는 것이오. 이제 의당 유민의 군과 두기의 군을 먼저 보내어 흥세산을 점거하게 하고 왕평은 뒤에서 막을 터이니 만약 적이 군사를 나누어 황금곡으로 향하면 왕평이 1천명을 거느리고 내려가 그들을 맞아 싸우겠소. 이러는 사이에 성도의 군대가 도착 할 것이니 이것이 계책의 으뜸이오.]

라고 말하는데 이 계책에 위에 언급된 유민이라는 장수만 뜻을 함께했다고 나옵니다. 바로 위 지도와 그 위 지도를 함께 보면 한중의 제장들이 내세운 전략은 정말 수비적이겠지요. 양평관보다도 안쪽에 있는 한성. 그리고 당낙도와 자오도를 다 지나 한중지방 내부에 사실상 들어오게하는 낙성. 이 두 군데에서 수비를 하자고 했으니 10배의 병력도 감당 가능하다는 수성의 입장이라지만 양평관의 방어선이 한성 밖에 있고 성도의 증원군보다 곽회군이 기산로에서 먼저 도착해 양평관을 타격하게 된다면 왕평의 예상되로 흘러가게 되겠지요. 그래서 한발 앞서 야전으로 막아내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hcsHjbD.png

이렇게 흥세산에서 유민군과 조상군이 대치하게 되고 압도적인 산맥을 넘어오는 동안 조상의 군은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 해 관중과 저족, 강족이 군수품을 대지 못해 소와 말, 노새와 나귀가 다수 죽었고 백성과 이민족이 도로에서 울부짖었다. 낙곡으로 들어가 수백 리를 행군했을 때 적이 산에 의지해 방비하자 진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평은

[촉의 장군 왕림(王林)은 밤에 군영을 기습했는데 사마소는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로 조상군을 야습 등의 방식으로 요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왕림이라고 표기가 되어있는데 이는 정설로는 왕평(平)의 오기로 추정하는 것으로 압니다.) 또한 추정으로 왕평이 하후패를 위에 언급된 황금곡같은 곳에서 요격하여 패퇴시켰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흥세산에서 조상의 군세를 보급을 어렵게 만들며 버티는데에 성공한 왕평의 한중군은 성도군을 이끌고 온 비의(강유)와 함께 조상군을 토벌합니다.

[조상 등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갈때 비의는 과연 3령(낙곡의 심령, 아령, 분수령)까지 쫓아왔는데 험난하게 다툰 끝에 위나라 군대는 겨우 통과 할 수 있었다. 소, 말과 군량을 수송하던 자들 중 거의가 죽거나 실종되어 강족과 호인들이 원망했고, 관서지방이 거의 텅텅 빌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어 7-8만에 달하는 조상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퇴를 하게되고 곽회군은

[촉을 토벌하자, 곽회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선봉이 되었다. 곽회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군사를 적지에서 탈출시켰기 때문에, 크게 패하지는 않았다.]

형세를 판단하며 진격하다 타이밍상 조상군의 진격이 늦어지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퇴각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렇게 왕평은 수하 부장 단 한명만 지지하던 전략으로 한중을 지키고 거시적으로는 촉을 수호해내게 됩니다. 244년에 조상군을 패퇴시키고 기록대로 관서지방의 자원을 마르게 할 정도로 위의 장안 지방은 힘을 잃게 만들어 위는 대촉전을 이전과 같이 방어전으로만 수행하게 되고 대촉 공세는 이로부터 약 20년뒤 낙곡전에도 참여했던 사마소가 263년 촉한멸망전을 시행하기까지 없게 됩니다. 이 낙곡전의 의미를 조금 과하게 표현한다면 제갈량 사후 10년을 한중에서 수호하던 왕평이 낙곡전을 계기로 20년간 촉한을 지키게 된 근 30년간의 대위방어를 해낸 촉의 수호신이 되었다라고도 평가할 수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4. 결
     유게 글과 저 지도를 보고 써봐야지 했다가 저 지도 훑어보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저 지도는 진짜 소중한 것 같네요.




아이유좋아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6:58
킹평....하지만 인기가 없어서 능력치는 매우 낮겠지 ㅠㅠ
글곰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7:04
그래도 요즘 통솔 80은 찍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왕평이 위연만도 못한 평가를 받는 게 분통터집니다만...
어제의눈물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6:59
코에이는 왕평 능력치를 올려달라!
WEKIMEKI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7:06
오호장들은 근처도 못갈 전공인데 ㅠㅜ
최초의인간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7:12
왕평이 좀만 더 오래 살았어도..
pioren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7:19
길치 왕평니뮤...
수지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7:22
진짜 왕평 정도면 못해도 학소정도 능력치는 줘야하지 않을까요?
Entropy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8:56
달리 생각해보면 왕평이 위에서 인정받고 지휘관자리 하나 차지했으면 촉의 수명이 얼마나 줄었을지..

항장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지만 개인적으론 통솔만은 장료급은 줘야하지않나 생각합니다.
지니팅커벨여행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5 19:08
진짜 삼국지 시리즈... 왕평 무력을 위연 앞에 통솔력은 관우 다음으로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ㅠ

그나저나 이야기 하신 김에 또 한명의 저평가 인재인 비의에 관해서도 써 주세요!
제갈량은 장완, 비의, 동윤이 있었고, 장완도 비의, 동윤을 데리고 일했지만, 비의는 혼자 했음에도 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게다가 사서에 구체적으로 천재적 업무처리가 묘사되어 있기까지 하는데 말이죠.
큰 개    클릭하면 해당 댓글의 단축주소가 복사됩니다.   
12/06 00:48
와룡전을 아직도 가끔 꺼내서 하는데 항상 윗분 말씀하신 것처럼 왕평 능력치를 학소나 여몽 급으로 올려서 플레이하곤 해요.
그러나저러나 저 기록을 봐도 군대가 한번 움직이면 주변 백성들은 그냥 갈려 나가는군요. 고대 사회에서 민초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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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1.

거란 춘화도


"범수(范睢): 대기만성의 모사"

작자: 미상

진소왕(秦昭王)시기에 위염(魏冉)은 진소왕을 옹립한 공로에다가 진소왕과 외숙-조카관계라는 점으로, 선태후(宣太后)의 총애를 받아, 대내적으로는 대권을 독점하고, 국정을 통할하며, 일생동안 4번이나 진상(秦相)을 역임했으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대외적으로는 동으로 확장을 주장하고, 적극적이고 신축성있는 외교수단을 이용하여 정면에서 전투를 벌이는 진군과 협조하여, 여러차례 산동의 여러 나라들을 격파했다.
진소왕14년, 백기는 진군을 이끌고 한, 위연합군은 이궐에서 격파하고, 24만명을 참수한다.
진소왕23년에는 진국이 연, 삼진(한,위,조)과 결성한 합종동맹에 참가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나라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제나라를 거의 멸망될 뻔했다.
진소왕27년에 진나라군대는 조나라로 진격하여, 대(代)의 땅에 있는 광랑성을 점령한다.
진소왕28년, 백기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등 여러 성을 함락시킨다. 다음 해,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킨다. 진나라는 이 곳에 남군을 설치하고, 초나라는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진을 수도로 삼는다. 그동안 위염은 여러번 계책을 내놓으니, 전적이 휘황했고, 그 위세를 널리 떨쳤다. 그는 그러한 공로로 양후에 봉해진다. 그러나, 제,초 두 강국을 물리친 후, 위염은 권모술수에 빠진다. 진나라의 무력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주력하고, 국가이익을 돌보지 않았다. 한, 위를 넘어 멀리 원정하여, 도읍을 탈취한다. 자신의 봉작을 추가하고 자신의 세력범위를 확대한다.</P>
<P>&nbsp;</P>
<P>이때, 위나라에서 온 한 유세객이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그 유세객의 이름은 범수이다. 그는 위나라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널리 배우고, 기민하였으며, 계책이 많고 언변이 좋았다. 일찌기 위나라왕의 밑에서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자금이 없었다. 할 수없이 위나라의 중대부 수가의 문하로 들어간다. 나중에 수가를 따라 제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나중에 제나라와 통모하여 위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다. 다행히 정안평의 도움을 받아,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바꾸고, 몰래 진나라사신 왕계를 따라 진나라로 가서 진소왕을 배알한다. 진소왕을 배알할 때, 범수는 먼저 진소왕에게 진나라가 직면한 형세를 분석해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의 사방은 모두 수비하기 좋은 요새이다. 북으로 감천이 있는데, 골짜기 입구를 지키면 되고, 남쪽으로 경수,위수의 두 강이 있고, 오른쪽에는 농서, 파촉이 있고, 왼쪽에는 함곡,효산이 있다. 진나라는 날카로운 병사가 이미 백만에 이르고, 전차가 천승에 이르며, 백성은 순박하고 용맹하여 국가를 위하여 열심히 싸울 수 있다. 국면이 유리할 때는 함곡관을 나서서 싸우고, 형세가 불리하면 함곡관을 지키며 적을 막으면 된다. 진나라는 하눌이 내린 지리적인 우세와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군대에 의존하여, 산동의 여러나라를 통제하고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천하의 패자가 되는 대업도 쉽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진나라는 지금까지 서쪽에 치우쳐 있어, 패업을 완성할 수 없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진나라의 전략상 실수때문이다. 진상 위염은 군대를 한,위를 넘어 제나라를 치게 했는데, 이것은 크나큰 실책이다. 파견하는 군대가 적으면 제나라에 손실을 가하기는 부족하다. 파견하는 군대가 적으면 천리길을 공급해야 하여, 진나라에 손실이 된다. 만일 가능한 한 적은 인원을 파견하면서 제나라에 손실을 가하게 하려면, 한, 위로 하여금 병력을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저 일방적인 생각이다. 정리상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저 동맹의 배신만 초래할 것이다. 일단 동맹관계에 흠이 가면, 한, 위를&nbsp;지나 제나라를 공격하는 행위는 아주 위험하게 된다. 이는 진나라를 위하여 영토를 넓힐 수도 없을 뿐아니라, 심지어 군대도 잃고 나라도 욕보이게 된다. </P>
<P>&nbsp;</P>
<P>당금천하에서 한, 위의 두 나라는 중원의 요지를 점령하고 있어, 천하의 문호이다. 진나라가 동으로 확장하려면 이 곳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진나라가 제후들에게 칭패하려면, 이전에 받들었던 전통인 '연횡"정책으로 충분하다. 만일 천하를 얻으려면, 이 전략은 중점이 불명확하고,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원교근공'의 전략을 세워야 한다. 즉 거리가 진나라에서 먼 나라들은 끌어들여 교분을 맺고, 거리가 진나라에서 가까운 나라들은 역량을 집중하여 공격하여 약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한 마디의 땅을 얻으면 그것이 왕의 한 마디가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그것이 왕의 한 자가 된다"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동시에 범수는 진소왕에게 '원교근공'전략을 실시하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한다: 먼저 이익과 위협의 두 가지 수단을 결합시켜, 한, 위를 통제하고, 이를 통하여 초, 조를 위력으로 복종시키고, 그리고 나서 제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화친한다. 그후에 되돌아와서 다시 한, 위를 소멸시킨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성을 하나하나 얻어가고, 땅을 하나하나 얻어가면서 점차 대외적으로 확장하면, 누에가 뽕나무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점차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 </P>
<P>&nbsp;</P>
<P>진소왕은 범수의 말에 크게 감탄한다. 그리하여 그를 객경(客卿)으로 삼아, 공동으로 용병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을 기획한다. 그리고 국가전략을 조정하여, 한, 위양국을 진나라의 동쪽확장의 중점대상으로 삼는다. 소왕39년, 소왕은 범수의 계책에 따라, 병력을 보내어 위나라를 공격하고, 회를 점령한다. 2년후, 다시 형구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진소왕42년, 범수는 다시 진소왕을 위하여 한나라를 공격할 계책을 세운다. 먼저 한나라의 인후에 해당하는 영양을 점령하여, 한나라를 3조각으로 나눈다. 한나라는 위기에 처하여 할 수 없이 진나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일련의 정복전쟁을 거쳐, 진나라의 국세는 날로 강성해지고, 산동의 여러나라들이 다 두려워했다. </P>
<P>&nbsp;</P>
<P>범수는 중국역사상 아주 걸출한 정치가, 군사전략가이다. 절대로 보통의 유세객과 다르다. 그는 깊이 알고 있었다. 진나라의 전략에서 혼란을 가져온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권신들이 너무 많고, 왕권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기' 때문이다. 법가학파는 정치영역에서의 "법(法)", "술(術)", "세(勢)"의 삼대요소를 아주 중시한다. 이 삼자가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는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법"이라는 것은 엄격한 법으로 나라를 단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공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잘못이 있으면 벌을 준다; "술"은 권모술수이다. 즉 군왕은 정치수단을 이용하여 정적에 대항하고,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세"는 권위이다. 군왕은 권력을 한몸에 쥐고 있으므로 절대적인 위신을 지니고 있다. 그래야 신하들을 부릴 수 있고, 만민을 호령할 수 있다. 여기에서 "법"은 치국의 기반이며, "술"은 변통의 수단이고, "세"는 법률이 최종적으로 작용을 발휘하는 근본보장이다. 진나라를 되돌아보면, 상앙의 법이 이미 전국시대 법전의 최고수준을 대표한다. 진나라른 이로 인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진나라왕은 대대로 명군이었다. 당시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군주가 여러 신하를 다스리고, 군림천하하는 권위였다. 그리하여, 범수는 진나라가 "가지가 무성하며 줄기가 약한(枝繁干弱)"의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다시 진소왕에게 "가지를 쳐서 줄기를&nbsp;튼튼하게 한다(削枝固干)"는 계책을 내놓는다. 이 계책을 통하여 점차 친인척과 고관들의 수중에서 대권을 박탈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군왕의 통치지위를 공고히 한다. 진소왕은 이 계책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P>
<P>&nbsp;</P>
<P>그리하여 진소왕41년에 양후(위염)의 상인(相印)을 회수하고, 그를 봉지에서 노년을 보내도록 명한다. 그리고 범수를 승상으로 삼고, 응후(應侯)로 봉한다. 곧이어 화양군, 경양군, 고릉군등 권신을 관외로 쫓아낸다. 동시에 선태후를 깊은 궁에 안치시키고 다시는 조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변혁을 통하여, 내부의 숨은 환부를 도려내고, 권력을 진소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의 수중에 집중시켜, 진나라의 정권이 더욱 안정되게 한다.</P>
<P>&nbsp;</P>
<P>범수가 진나라에 온 후 바친 두 번의 계책은 근본을 튼튼히 했으며, 그 뜻이 아주 깊었다. "삭지고간"은 진나라내부에 착안하여, 권신의 실력을 약화시켰고, 군주제중앙집권을 강화시켜, 진나라가 최종적으로 제후의 분쟁을 끝내고, 천하통일을 완성하도록 유리한 정치적 보장을 제공했다. "원교근공"은 열국의 형세를 감안하여, '문과 무를 병용하고, 제후들을 이간시키며, 가까운데서부터 시작하여 먼 곳으로 가며, 하나하나 잠식한다(문무병용, 분화제후, 유근급원, 축개잠식)"는 것은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중국역사상 각 정치세력이 다자간 투쟁을 진행할 때의 중요전략중 하나가 된다. 지금까지도 그 지혜의 빛은 여전히 빛난다. 원나라때 오사도는 &lt;전국책교주&gt;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이 술책을 써서 제후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시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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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태후(秦宣太后): 아주 독특한 황태후"

글: 청청자긍(靑靑子矜)


진나라의 선태후는 이름이 미팔자(?八子)이다.
진나라 혜문왕(惠文王)의 비(妃)이며, 헤문왕이 죽은 후 태자인 무왕(武王)이 등극하였고, 무왕이 죽은 후 자식이 없어서, 그의 동생인 소왕(昭王)이 등극했다.
소왕의 모친인 미팔자는 자연히 선태후에 올랐다.
사상 첫번째로 태후(太后)라고 불린 인물이다.
이 여인은 아주 대단했다.
그 이후 뛰어난 정치수완으로 진나라의 정치를 36년간 손안에 쥐고 있었다.
이 여인은 또한 아주 독특했다.
다른 여인들도 남자들과 어울려 즐기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요조숙녀인 것처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태후의 자리에 앉은 미팔자는 공공연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성생활을 털어놓곤 했다.
이는 중국의 수천년간 봉건사회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전국책. 한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초(楚)나라가 한(韓)나라를 포위했다.
그러자 한나라는 사신을 진나라로 보내어 지원을 요청했다.
진나라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나라에서는 다시 상근(尙?)을 보낸다.
상근은 순망치한의 관점에서 진나라를 설득한다.
선태후는 다 듣고 난 후, 상근의 말은 이치에 맞는다고 보고 그를 단독으로 들어오게 해서 접견했다.
이때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선왕과 잠자리를 할 때, 선왕이 엉덩이로 내 몸을 누르면 내가 무거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선왕이 온몸으로 내 몸 위에서 누르면 조금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아느냐?
바로 그 자세는 나에게도 이롭기 때문이다.
만일 한나라를 구해주느라고 천금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나에게 무슨 이로운 게 있는가?
선태후의 비유나 말은 정말이지 태후가 해서는 안되는 말일 것이다.
사마천의 견해에 따르면, 소왕이 막 즉위한 후, 선태후는 자신이 초나라사람이므로, 이때 한나라를 도와서 자기의 친정인 초나라를 힘들게 하고싶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도와주지 않을 것이면 그냥 도와주지 않으면 되지, 왜 하필이면 아들도 있고, 대신들도 있는 앞에서 자기와 선왕과의 잠자리 얘기까지 꺼내는가?
이런 음탕한 말을 하면 아들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역시 전국책에서는 그녀에 대하여 한마디 했고, 후세의 문인들도 이것을 빌미로 그녀에 대하여 좋게 말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국사를 논하는 자리인가?
분명히 약간은 성희롱하는 것같다.
상근이 경박한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선태후가 적막을 이기기 힘들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선태후를 유혹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선태후가 이처럼 거리낌없이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진나라에서의 지위가 너무나 확고하고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두 남동생이 있는데, 하나는 부친이 다른 동생인데 양후(穰侯)이며, 이름은 위염(魏?)이었다.
또 하나 부친이 같은 동생은 화양군(華陽君)이었다.
소왕의 모친이 같은 동생들(즉, 선태후가 낳은 아들들)로는 고릉군(高陵君), 경양군(涇陽君)이 있었다.
이들 형제들 중에서는 위염이 가장 뛰어났다.
그는 혜왕, 무왕시기에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다.
무왕이 죽은 후, 여러 동생들이 왕위를 놓고 싸울 때, 소왕은 위염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순조롭게 오를 수 있었다.
위염은 장군에 임명된 다음 해에 소왕의 여러 동생들을 제거함으로써 진나라에 위세를 날렸다.
선태후가 순조롭게 수렴청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충성스러운 동생인 양후 위염과 뗄레야 뗄 수없는 관계에 있었다.
선태후는 비록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흉금이 넓은 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소왕에게 일정한 권력의 공간을 남겨주었다.
그리하여 소왕은 혼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어느 정도 할 수가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한나라를 지원해주는 일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한나라사람들은 선태후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몰래 단독으로 젊은 소왕을 만나서 이해관계를 설명한다.
소왕은 선태후가 좋아하든 말든 관여치 않고, 나중에 군대를 보내어 한나라를 도와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렇게 하더라도 그를 사랑하는 모친이 이 일로 그를 힘들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가 무측천과 같이 자기의 아들마저 죽이는 어머니를 두었다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여인은 일단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면, 그녀의 몸은 마치 권력이 쓰러지지 않게 보호하는 방패처럼 된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 그녀가 자신을 마치 발정난 암늑대처럼 하는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권력과 욕망이 충돌할 때 어느 것을 중요한가의 문제에 있어서, 여성정치가인 미팔자는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의거왕(義渠王)과 사통하던 시기에도 그녀는 음탕하기는 했지만 국가를 잊지는 않았다.
나중에 그 의거왕에게 싫증이 나자 그녀는 바로 아이디어를 내어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처치해 버린다.
이어서 쾌도난마식으로 병력을 일으켜 나라까지 집어삼킨다.
이는 진나라가 혜왕이 의거국의 15개 성을 빼앗은 이래로 진나라가 흉노에 대하여 거둔 아주 중요한 승리이다.
나중에 진시황에 천하통일하는데 좋은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이에 대한 이야기를 사마천은 그의 사기. 흉노열전에서 아주 상세히 기록했다:
"....진소황때, 의거융왕(義渠戎王)과 선태후가 놀아났고, 두 아들을 두었다. 선태후는 속임수를 써서 의거융왕을 감천에서 죽인다. 그리고 병사를 일으켜 의거의 잔당을 토벌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농서, 북지, 상군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 호(胡, 흉노)를 막는다."
역대에 많은 학자들은 그녀가 의거왕을 죽인 데 대하여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한 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의거왕과의 사이에 이미 두 아들이나 낳은 그녀가 하룻밤에 만리장성도 쌓는데, 어떻게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사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점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선태후의 마음 속에는 영원한 애인도 없고 단지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다.
자기의 아들을 위하여, 그녀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자기의 사사로운 정을 포함한 모든 것은 반드시 그녀와 아들이 이 국가를 통치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여야 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눈물콧물을 흘리는 그러한 멍청한 여인이 아니었다.
남자란 그녀가 보기에 그저 언제든지 즐기고 바꿀 수 있는 맛있는 요리와도 같았다.
약간의 취미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좋아한 것은 권력이다.
여러해동안의 궁중투쟁을 거쳐, 그녀의 마음 속에서 '여인네의 여린마음(婦人之仁)'은 일찌감치 독랄한 마음과 손속으로 대체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권력의 꼭대기까지 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그때 그녀에게는 위추부(魏醜夫)라는 새로운 애인이 생겼었다.
옛것을 버리지 않고서야 어찌 새것을 얻겠는가?

그러나 호랑이가 아무리 사나워도 조는 때는 있기 마련이다.
나중에 진나라로와서 소왕의 총애를 받는 위나라출신의 유세객이 있는데, 이름이 범수(范?)이다.
그는 소왕을 통해서 부귀영화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고, 이를 위하여 기회를 틈타 이들 모자간을 이간질한다.
선태후의 권세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온 것이다.
범수는 진소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이전에 함곡관 동쪽에 있을 때 제나라에 전단(田單)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제왕(齊王)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진나라에는 선태후, 양후, 경양군, 화양군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왕께서 계시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국가정권을 통할하고 생사여탈권을 장악한 사람이라야 군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태후가 행정을 마음대로 하여 대왕에게까지 미치질 않습니다. 양후는 사신을 내보내면서도 대왕에게 보고하지 않습니다. 경양군, 화양군은 마음대로 범죄라를 처벌하지만 대왕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고릉군은 사람을 쓰거나 내보내면서 대왕에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이 네 귀족이 있는데, 국가가 어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대왕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정권이 어떻게 전복되지 않겠습니까? 대왕이 어떻게 천하를 호령하겠습니까...내가 보기에 대왕은 현재 혼자서 외롭게 조당에 앉아있는 것같습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후에 진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이 대왕의 후손이 아닐 것같다는 것입니다"
어느 군왕이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되는 것을 바라겠는가.
범수의 이 말은 진소왕의 아픈 곳을 제대로 찔렀다.
진소황은 깜짝 놀랐다.
그는 정말 권력을 장악한 형제, 친척들이 자기의 보좌를 빼앗을까봐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선태후의 권력을 빼앗아버리고, 다른 형제, 친척들의 권력도 빼앗고는 변방으로 보내버렸다.
양후가 서울을 떠날 때, 마차가 천량이나 되었고, 마차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실려서 재산이 나라와 맞먹을 정도였다.
소왕은 범수를 응후(應侯)에 봉하고, 제공이 관중을 중보(仲父)로 부른 것처럼 그를 보(父)라고 불렀다.
진소왕이 그의 모친에 대하여는 인의를 다한 것이라고 할 수 가 있다.
단지 조정에 간여할 권한만을 빼앗았을 뿐, 그녀가 위추부와 사랑놀음을 하는 것에 대하여는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애인과 놀 수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선태후의 마음이 즐겁겠는가?
그 때이후 선태후는 우울증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아들에게 지고 싶어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죽기 전에 유언도 황당하게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위추부를 자기의 묘에 같이 묻어달라고 한 것이다.
위추부는 이 말을 듣고는 걱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소왕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모친의 화를 돋굴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용예(庸芮)라는 인물을 보내어 선태후를 설득하여, 위추부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거두게 한다.
용예는 선태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지각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태후는 "사람이 죽은 후라면 당연히 아무 것도 모르겠지."
그러자 용예가 이어서 말한다:
"태후와 같이 이렇게 똑똑한 분이, 사람이 죽고나면 아무런 지각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고 계시는 분이,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하십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그래도 뭔가를 안다고 한다면, 선왕은 일찌감치 태후에 대하여 원한이 뼈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태후께서는 속죄하려고 해도 마땅치 않은데, 하물며 위추부를 데리고 함께 선왕을 만나시겠습니까."
선태후는 용예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위추부를 순장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선태후는 그후 2년도 되지 않아 병으로 죽는다.
그녀의 음탕한 가풍은 아마도 후대에도 이어진 것같다.
그녀의 손자며느리인 조희에 이르러, 먼저 여불위와 사통하고, 다시 노애와 어울렸다.
그러나, 진시황은 선조인 진소왕처럼 마음을 써주지 않았다.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이다.

"태후조희(太后趙姬)의 진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을 깍아내리는 것으로는 2가지가 핵심이다:
하나는 "한단헌희(邯鄲獻姬)"
즉, 한단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시황의 부친 이인에게 여불위가 임신한 조희를 바쳐 진시황을 낳았으므로 진시황의 생부는 여불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후선음(太后宣淫)"으로 진시황의 모친인 태후 조희는 아주 음탕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진시황은 졸지에 사기 속에서 "생부불명, 생모불청(生父不明, 生母不淸)"의 잡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분이 미천한 장삿군의 혈통을 이었으니, 아무리 개세의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후세인들에게 조롱이나 받게 맏든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생부(生父)에 관한 수수께끼는 많은 고증을 거쳐 이제는 거의 진상이 드러났고, 진시황은 여불위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이제 처리해야 하는 것은 태후조희가 음란하였다는 부분에 관한 것이다.

"태후선음"은 그저 '한 여인과 세 남자의 이야기'의 제3장에 불과하다.
아들 영정(진시황)을 빼고, 조희의 운명에 가장 밀접하게 영향을 미친 남자라면 이인(異人), 여불위(呂不韋), 그리고 노애(嫪毐, Laoai)이다.
특히 이중 거의 아무런 중대한 배경자료나 참고할만한 것이 없는 노애가 제3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조희의 일생에서 가장 신비한 남자이기도 하다.

사기에서 노애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기이하다.
"대음인(大陰人)"이라는 말고 개괄한 것을 제외하고는, 자세하게 그의 양물이 장대하다는 것을 묘사한다.
양물로 마차바퀴의 구멍에 넣어서 마차를 움직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신세내력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사기에서 고의로 노애의 진실한 신분을 숨기고 있다고 보거나 혹은 노애라는 인물이 아예 허구일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애가 입궁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사기의 논리모순은 명확해 진다:
조희는 음란하여 자주 여불위를 불러서 욕망을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여불위는 이 일이 들통날까 두려워, 노애가 이미 거세되어 내시라는 증명을 위조하여, 그로 하여금 태후와 사통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설마 여불위는 자기가 사통하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통하게 하나 똑같이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만일 어느 대신이 감히 태후를 위하여 이렇게 하려면, 그 태후는 반드시 무측천, 서태후 수준의 절대권력을 가져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희는 사기를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음란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재주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조희는 노애의 침상에서의 재주에 반해서 아주 즐거워하며, 보배를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그 후에 그녀는 노애와 후궁에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기며, 결국 임신했다고 한다.

이 부분의 묘사는 태후에 대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기녀에 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을 벌이는 곳이 진나라 궁중일 수 있겠는가?
분명히 기원을 묘사한 글이다.
법과 기강이 엄격했고 이를 기반으로 발전을 이루어온 진나라에서 설마 이처럼 엉터리없는 짓이 용납되었단 말인가?
사실, 노애는 바로 말 그대로 엄인(閹人, 내시)이다.
태후조희의 위세를 등에 없고, 감히 여불위에게 덤벼든 총신일 뿐이다.

조희의 일생에서 진나라 장양왕(莊襄王, 즉 한단에 인질로 가 있던 이인(異人)이며 진나라에 돌아와서 태자가 된 자초(子楚)이다)이 가장 중요한 남자이다.
그러나, 사기는 진시황에 대하여, 조희에 대하여 그리고 전체 진나라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인물인 그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의 재위기간이 짧아서 쓸 거리가 적어서일까?
아니면 그가 뭐 역사에 남길만한 일들을 하지 못해서일까?
분명히 이는 아니다.

그는 최소한 왕위에 3,4년간 있었는데, 궁중에서 후궁과 놀아나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처럼 삼십여세(죽었을 때 삼십육세이다)의 국왕이 험난한 고난을 겪고서 비로소 왕위에 올랐는데, 정말 조희와 매일 놀아나기만 했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을 후계자로 정하다니 조부인 소양왕(昭襄王), 부친인 효문왕(孝文王)은 사람보는 눈이 없단 말인가?

진나라는 이 시기에 날로 강성해졌는데, 그럼 진나라가 무엇때문에 강성해 졌는가?
분명히 어떤 사람이 사기에 손을 본 것이다.
진시황의 부친에 관한 많은 부분을 삭제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력도 불분명한 노애에 대하여 대거 떠든 것이다.
목적은 오직 하나일 것이다:
진시황의 부모를 함께 깍아내림으로써 진시황을 나쁜 놈으로 만들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여불위는 확실히 진나라의 공신이자 권신이었다.
장양왕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국왕으로서 여불위의 세력을 방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여러해 동안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는 여불위의 능력과 사람됨을 잘 알았을 것이다.
한 나라와 삼십여세된 과부와 열세살된 아들을 이런 일개 상인에게 맡기고 가면서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까?

조정의 문무대신들 중에 누가 여불위와 맞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누가 감히 여불위와 맞서려고 할까?
사실 시간을 추산해보면, 노애는 이미 장양왕이 죽기 전부터 정계에 들어와 있었다.
이 자는 비록 엄인이지만, 아주 총명했다.
그리고 여불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조희는 이런 사람과 손을 잡고 그를 방패막이로 삼아 시시때때로 여불위를 견제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진시황이 비로소 친정(親政)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면, 정계의 세력은 이쪽이 강해지면 저쪽이 약해진다.
이 노애는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진 이후에, 문신후(文信侯) 여불위는 책을 쓰는 것 이외에는 거의 자기의 포부를 실현시킬 수 없는 상태에 처해지고 만다.
사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때 궁을 옮겨 옹에 거주한 후, 노애가 항상 따랐고, 상으로 받는 하사품이 아주 많았다. 일은 모두 노애가 결정했다. 노애는 집안에 노예가 수천이고, 여러 손님들이 벼슬을 구하여 찾아와서 노애의 집에 있는 사람이 천여명이었다..."
이로써 볼 때, 여불위는 전혀 뜻을 펼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노애를 정말 여불위가 추천했다면, 노애와 조희는 여불위에게 십분 감사하는 것이 맞다.
왜 여불위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관계가 되어버린 것일까?
당시의 제도에 의하면 태후는 상국(相國)을 몰아낼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 진시황이 일단 친정을 하자마자 노애를 제거한 것은 왜 그랬을까?
사실 아주 간단하다.
영정이 친정을 하는데에는 두 가지 장애가 있었다.
하나는 노애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여불위집단이다.
그는 반드시 이 두 세력을 제거해야 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 대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전국책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자가 누구인가? 노씨인가 여씨인가?...왕이 땅을 떼어 진나라에 준 것은 노애의 공이다. 진나라가 존귀하게 된 것은 노애때문이다....이제 노씨가 진나라를 잘 다스리니 사귀는 것이 천하의 상책이다. 천하의 누가 여불위를 버리고 노애를 따르지 않겠는가? 천하는 반드시 여불위를 버리고 노애를 따를 것이다..."
이런 기술을 보면, 노애의 당시 권세는 이미 일개 내시의 수준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직접 여불위를 압박하고 진시황도 불안하게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여불위집단이 노애에게 억제당할 때, 여불위의 세력을 도와서 노애집단부터 처리한 다음에, 나중에 다시 여불위를 손봐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진정 원통한 것은 여불위가 아니라 노애이다.
만일 노애가 정말 반란을 하고자 했다면, '시황9년'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정이 친정한 후에 바로 손을 쓰는 것이 좋았다.
더구나 소위 자기와 태후의 사이에 난 소생인 '두 아들'을 위하여 일을 벌일 것도 아닌 것이다.
진시황에 관하여, 사기에는 많은 헛점과 모순이 나타난다.
특히, "한단헌희"와 "태후선음"이 심하다.
생각해보라.
조희의 출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모호할 뿐아니라 스스로 모순된다.
사기는 진시황의 생모 조희의 출신에 대하여 서로 모순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한단의 기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씨호족집안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불위가 그녀를 이인에게 바칠 때의 표정과 심리는 아주 생생하게 눈에 보는 듯이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리가 이런 소위 사실(史實)을 믿을 이유가 있단 말인가?

조희는 홍안박명이라고, 삼십여세에 과부가 되었으며, 선택할 수 없는 정치적인 풍랑 속으로 말려들어간다.
많은 적막한 밤에, 그녀는 아마도 아주 강렬한 성의 충동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런 권력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바로 예전에 그녀가 어린 아들 영정(진시황)을 데리고 조나라에서 이리저리 숨어가면서 목숨을 보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친정하기 전에 가능한한 영정의 왕위를 보전시켜주어야 했다.
그래서 내시까지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불행한 여자가 얻은 것은 천년동안 씻을 수 없은 오명이었다.
이것들은 그녀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진시황을 겨냥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시황의 행위와 조치는 춘추필법에 능한 유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춘추필법이라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심리적인 통쾌함과 만족감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고대에 민간에서 진시황을 깍아내리는 여러가지 소문들이 나타난 이유이다.
후세인들에게 불행한 것이라면, 이렇게 깍아내리기에 역사학의 경전인 사기가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이사(李斯): 상채소리(上蔡小吏) 혹은 제국승상(帝國丞相)"

글: 맹헌실

대진제국大秦帝國 이세황제 2년 기원전208 7월, 전 승상 이사는 반란죄로 삼족을 멸하는 처벌을 받고, 같은 날 작은 아들과 함께 함양의 시장에서 요참(腰斬)을 당한다.
형이 집행되는 것을 구경한 사람에 따르면, 이사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너와 함께 우리집의 누렁이를 데리고 상채의 동문에서 들토끼를 잡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러고는 부자 두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이사는 죽기 전에 고향인 상채를 그리워하고, 상채에서 지냈던 아름다운 생활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전국시대의 상채는 진한때 여남군(汝南郡)에 속하며, 초나라의 판도에 속했다.
젊었던 이사는 바로 상채지방의 소리(小吏, 하급관리)였다.
지위는 낮았지만, 마음 속에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두 마리의 쥐가 이사의 인생관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화장실에 사는 쥐를 보았는데, 더럽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다시 양식창고에 사는 쥐를 보았는데, 여유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크게 깨다른 바가 있었다.
인생도 쥐와 같고, 지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SPAN>그리하여<SPAN lang=EN-US>, </SPAN>그는 자신의 낮은 지위와 평민생활을 바꾸어보기로 결정한다<SPAN lang=EN-US>.

자기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SPAN lang=EN-US>, </SPAN>이사는 글을 읽는다<SPAN lang=EN-US>. </SPAN>저명한 학자인 순자<SPAN lang=EN-US>(</SPAN>荀子<SPAN lang=EN-US>)</SPAN>를 스승으로 모시고<SPAN lang=EN-US>, ‘</SPAN>제왕지술<SPAN lang=EN-US>’</SPAN>을 익힌다<SPAN lang=EN-US>. </SPAN>다 배운 후에<SPAN lang=EN-US>, </SPAN>이사는 글을 쓰거나 학설을 내세우지 않고<SPAN lang=EN-US>, </SPAN>정치에 뛰어든다<SPAN lang=EN-US>. </SPAN>그가 순자를 떠날 때 이렇게 말한다<SPAN lang=EN-US>. “</SPAN>진나라가 곧 천하를 집어삼킬 것이며<SPAN lang=EN-US>, </SPAN>천하형세는 크게 변화될 것이다<SPAN lang=EN-US>. </SPAN>이때가 비로소 포의지사<SPAN lang=EN-US>(</SPAN>布衣之士<SPAN lang=EN-US>)</SPAN>들이 뜻을 펼칠 좋은 기회이다<SPAN lang=EN-US>. </SPAN>사람의 가장 큰 질병은 비천이고<SPAN lang=EN-US>, </SPAN>가장 큰 비애는 빈곤이다<SPAN lang=EN-US>. </SPAN>이익을 말하지 않고<SPAN lang=EN-US>, </SPAN>무위를 주장하는 것은 글읽는 선비의 진심이 아니다<SPAN lang=EN-US>.” </SPAN>그는 진나라로 들어가서 크게 일을 해볼 결심을 한다<SPAN lang=EN-US>. </SPAN>상채를 떠날 때의 가치관은 여전히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사가 진나라로 들어간 후<SPAN lang=EN-US>, </SPAN>상국 여불위의 식객이 된다<SPAN lang=EN-US>. </SPAN>여불위는 그를 중시했고<SPAN lang=EN-US>, </SPAN>그에게 낭관<SPAN lang=EN-US>(</SPAN>郎官<SPAN lang=EN-US>)</SPAN>의 직위를 준다<SPAN lang=EN-US>. </SPAN>그리하여<SPAN lang=EN-US>, </SPAN>이사는 진왕과 접촉할 기회를 갖고<SPAN lang=EN-US>, </SPAN>자기의 학설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된다<SPAN lang=EN-US>. </SPAN>그는 진왕에게 역사변천과 천하정세를 분석해주면서<SPAN lang=EN-US>, </SPAN>제후를 멸하고 제업을 이루며 천하통일을 하는 것이 진나라에게는 다시 얻기 힘든 기회라는 점과 조금만 시기를 놓치면 흘러가버리니 기회를 꽉 잡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했다<SPAN lang=EN-US>. </SPAN>진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사를 장사<SPAN lang=EN-US>(</SPAN>長史<SPAN lang=EN-US>)</SPAN>를 삼는다<SPAN lang=EN-US>. </SPAN>이사는 전문적으로 육국을 와해시키는 업무를 수행하고<SPAN lang=EN-US>, </SPAN>그들의 군신을 이간시키고<SPAN lang=EN-US>, </SPAN>그들의 인재를 빼내오는 일을 한다<SPAN lang=EN-US>. </SPAN>성과는 뛰어났고<SPAN lang=EN-US>, </SPAN>객경<SPAN lang=EN-US>(</SPAN>客卿<SPAN lang=EN-US>)</SPAN>으로 승진한다.
이사는 평민에서 분투하여 성공한 전혀적인 인물이다<SPAN lang=EN-US>. </SPAN>그는 한걸음 한걸음 자기의 부귀를 얻어간다.
바로 이때<SPAN lang=EN-US>, </SPAN>진나라에는 중대한 간첩사건이 일어난다<SPAN lang=EN-US>. </SPAN>한<SPAN lang=EN-US>(</SPAN>韓<SPAN lang=EN-US>)</SPAN>나라에서 간첩 정국(鄭國)을 파견하여 진나라에서 수거<SPAN lang=EN-US>(</SPAN>水渠<SPAN lang=EN-US>)</SPAN>공사를 벌이게 한다<SPAN lang=EN-US>. </SPAN>이유는 수리공사를 하게 하여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SPAN lang=EN-US>, </SPAN>이를 통해서 한나라를 침략할 역량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다<SPAN lang=EN-US>. </SPAN>사건이 드러난 후<SPAN lang=EN-US>, </SPAN>많은 사람들은 산동육국에서 온 사람들의 목적이 불순하다고 생각하고<SPAN lang=EN-US>, </SPAN>모두 자기의 고국을 위하여 애를 쓴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모두 축출하고자 한다<SPAN lang=EN-US>. </SPAN>정책이 거의 정해진 것처럼 보였고<SPAN lang=EN-US>, </SPAN>초나라에서 온 이사도 축출대상에 들어있었다.

진나라가 벼랑끝으로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SPAN lang=EN-US>, </SPAN>자기의 꿈도 물거품이 되는 것을 느꼈다<SPAN lang=EN-US>. </SPAN>그리하여 이사는 진왕에서 간곡한 건의서를 올린다<SPAN lang=EN-US>.</SPAN>이사는 진나라의 여러 유명한 인물을 열거하는데<SPAN lang=EN-US>, </SPAN>백리해<SPAN lang=EN-US>(</SPAN>百里奚<SPAN lang=EN-US>)</SPAN>부터 상앙<SPAN lang=EN-US>(</SPAN>商&#38789;<SPAN lang=EN-US>)</SPAN>에 이르기까지<SPAN lang=EN-US>, </SPAN>장의<SPAN lang=EN-US>(</SPAN>張儀<SPAN lang=EN-US>)</SPAN>에서 범수<SPAN lang=EN-US>(</SPAN>范&#30562;<SPAN lang=EN-US>)</SPAN>까지 그들은 모두 육국에서 온 사람들이지만<SPAN lang=EN-US>, </SPAN>그들은 모두 진나라의 발전과 진나라가 다른 제후들을 이기는데 큰 공을 세웠다<SPAN lang=EN-US>. </SPAN>이사가 내린 결론은 <SPAN lang=EN-US>“</SPAN>물건중에 진나라에서 나지 않았지만 보물이 많고<SPAN lang=EN-US>, </SPAN>선비중에 진나라에서 나지 않았지만<SPAN lang=EN-US>, </SPAN>진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자들도 많다<SPAN lang=EN-US>” </SPAN>그는 현재의 축객령은 <SPAN lang=EN-US>“</SPAN>축객을 함으로써 다른 나라를 튼튼하게 해주며<SPAN lang=EN-US>”, </SPAN>이는 진나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사의 글은 진나라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브레이크역할을 했다<SPAN lang=EN-US>. </SPAN>각국은 이사와 같은 인물들의 출생지일 뿐이고<SPAN lang=EN-US>, </SPAN>그들의 아�속에는 아마도 조국의 개념은 없었을 것이다<SPAN lang=EN-US>. </SPAN>이사의 조국은 천하였는지<SPAN lang=EN-US>, </SPAN>아니면 개인의 부귀영달인지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SPAN lang=EN-US>. </SPAN>진왕은 바로 깨닫고는 축객령을 철회하고<SPAN lang=EN-US>, </SPAN>계속 이사를 중용한다<SPAN lang=EN-US>. </SPAN>이사에게 정위<SPAN lang=EN-US>(</SPAN>廷尉<SPAN lang=EN-US>)</SPAN>의 관직을 내린다<SPAN lang=EN-US>. </SPAN>이사의 부귀영달의 길은 아직 계속된다<SPAN lang=EN-US>. 20</SPAN>년후<SPAN lang=EN-US>, </SPAN>진나라는 과연 천하를 통일했다<SPAN lang=EN-US>. </SPAN>이사는 승상<SPAN lang=EN-US>(</SPAN>丞相<SPAN lang=EN-US>)</SPAN>이 된다<SPAN lang=EN-US>. </SPAN>사실이 증명해주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이사의 당초판단이 역사의 발전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SPAN lang=EN-US>. </SPAN>이사의 개인의 발전계획은 역사발전의 박자에 맞았고<SPAN lang=EN-US>, </SPAN>이사의 학식은 그가 부귀를 실현하는 바탕이 되었다.
진시황의 통일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제반정책은 이사에게서 나왔다<SPAN lang=EN-US>. </SPAN>차동궤<SPAN lang=EN-US>(</SPAN>車同軌<SPAN lang=EN-US>), </SPAN>서동문<SPAN lang=EN-US>(</SPAN>書同文<SPAN lang=EN-US>), </SPAN>군현제<SPAN lang=EN-US>(</SPAN>郡縣制<SPAN lang=EN-US>)</SPAN>를 비롯하여<SPAN lang=EN-US>, </SPAN>서로다른 정견을 가진 자들을 타도하고<SPAN lang=EN-US>, </SPAN>악명이 자자한 분서갱유정책까지<SPAN lang=EN-US>… </SPAN>이와 동시에 그의 부귀영달도 전성기에 이른다<SPAN lang=EN-US>. </SPAN>그의 자녀들은 모두 황실과 결혼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의 장남인 이유<SPAN lang=EN-US>(</SPAN>李由<SPAN lang=EN-US>)</SPAN>는 삼천군의 태수를 지냈는데<SPAN lang=EN-US>, </SPAN>한번은 이유가 집으로 돌아왔다<SPAN lang=EN-US>. </SPAN>이사는 집에서 잔치를 벌였는데<SPAN lang=EN-US>, </SPAN>잔치에 참여한 마차가 수천대였다<SPAN lang=EN-US>. </SPAN>이렇게 성대한 연회에 이사는 돌연 옛스승 순자를 생각했다<SPAN lang=EN-US>. </SPAN>순자는 “물금대성(物禁大盛, 물질이 너무 성대한 것은 금하라)”이라고 말한 바 있다<SPAN lang=EN-US>. </SPAN>왜 <SPAN lang=EN-US>‘</SPAN>물금대성<SPAN lang=EN-US>’</SPAN>인가<SPAN lang=EN-US>? </SPAN>왜냐하면 물극필반<SPAN lang=EN-US>(</SPAN>物極必反<SPAN lang=EN-US>, </SPAN>모든 일이 끝까지 가면 거꾸로 되돌아오는 법이다<SPAN lang=EN-US>)</SPAN>이 법칙이기 때문이다<SPAN lang=EN-US>. </SPAN>이사는 이미 자기의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였다는 것을 알았다<SPAN lang=EN-US>. </SPAN>당초 상채의 포의에서 지금의 이러한 지위까지 오른 것은 원래 추구하던 바가 아니었던가<SPAN lang=EN-US>? </SPAN>그 연회에서 이사는 여러 손님들에게 상채를 이야기 하고<SPAN lang=EN-US>, </SPAN>상채에서 포의로 품었던 꿈을 얘기했고<SPAN lang=EN-US>, </SPAN>심지어 물극필반을 얘기한다<SPAN lang=EN-US>. </SPAN>다만<SPAN lang=EN-US>, </SPAN>그는 자기인생의 꺽어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을까.
진시황<SPAN lang=EN-US>37</SPAN>년<SPAN lang=EN-US>(</SPAN>기원전<SPAN lang=EN-US>210</SPAN>년<SPAN lang=EN-US>) 7</SPAN>월<SPAN lang=EN-US>, </SPAN>황제는 동방을 순유하는데<SPAN lang=EN-US>, </SPAN>사구에 도착했을 때 병으로 사망한다<SPAN lang=EN-US>. </SPAN>임종전에<SPAN lang=EN-US>, </SPAN>그는 사람을 불러 북방의 전선에 가 있던 장남 부소<SPAN lang=EN-US>(</SPAN>扶蘇<SPAN lang=EN-US>)</SPAN>를 불러오게 명한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SPAN lang=EN-US>, </SPAN>서신이 출발하기도 전에 그는 죽어버린다<SPAN lang=EN-US>. </SPAN>승상 이사<SPAN lang=EN-US>, </SPAN>환관 조고는 황제의 작은 아들 호해<SPAN lang=EN-US>(</SPAN>胡亥<SPAN lang=EN-US>)</SPAN>가 당시 황제의 곁에 있었고<SPAN lang=EN-US>, </SPAN>황제가 서거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몇몇이었다<SPAN lang=EN-US>. </SPAN>시황제가 부소를 후계자로 하려는 의도는 분명했지만<SPAN lang=EN-US>, </SPAN>조고는 호해를 옹립하기로 결정한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조고는 조정에서 이사만큼 권위가 없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하여 그는 이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SPAN lang=EN-US>, </SPAN>이사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조고가 이사를 설득하기 위하여 한 말은 천백년후에도 여전히 경전이다<SPAN lang=EN-US>. </SPAN>조고는 먼저 이사에게 만일 부소가 황제가 되면 이사의 현재 지위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SPAN lang=EN-US>. </SPAN>그 후에 수십년의 정치경험에 따르면 이사와 같이 고위직에 있던 사람 중에서 이세까지 복을 누리는 경우가 적다고 말한다<SPAN lang=EN-US>. </SPAN>마지막으로 이사에게 모든 것은 호해의 수중에 달렸다고 말하며<SPAN lang=EN-US>, </SPAN>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말한다<SPAN lang=EN-US>. </SPAN>이사는 처음에는 명확히 반대했고<SPAN lang=EN-US>, </SPAN>심지어 상채에서 이사는 평민에 불과했는데<SPAN lang=EN-US>, </SPAN>지금 이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모두 시황제가 내린 것인데<SPAN lang=EN-US>, </SPAN>시황제에 불충한 일은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 후에<SPAN lang=EN-US>, </SPAN>역사상 태자를 바꾼 다음에 나라가 망한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SPAN lang=EN-US>, </SPAN>지금 태자를 바꾼다면 역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SPAN lang=EN-US>, </SPAN>조고의 유혹앞에 결국 이사는 타협한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조고의 음모에 가담한다.
얻기 힘든 부귀가 눈앞에 있게 되면<SPAN lang=EN-US>, </SPAN>포의출신의 이사가 비록 입을 열 때마다 관계없다고 하지만<SPAN lang=EN-US>, </SPAN>사실 그의 이런 경력은 더더구나 기회를 버리기 힘들게 만들어ㅆ다<SPAN lang=EN-US>. </SPAN>현재의 부귀영화는 그가 일생동안 노력한 결과이고<SPAN lang=EN-US>, </SPAN>그의 고생 그의 피와 땀 그리고 죽어라 싸워온 결과인 것이다<SPAN lang=EN-US>. </SPAN>자신의 부귀를 유지하려면 대가는 무엇일까<SPAN lang=EN-US>? </SPAN>그것은 이사가 너무나 잘 알았다<SPAN lang=EN-US>. </SPAN>국가의 파괴이고 정치의 위기이다<SPAN lang=EN-US>. </SPAN>최종적으로는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다<SPAN lang=EN-US>. </SPAN>모든 충성<SPAN lang=EN-US>, </SPAN>모든 학식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이념도 개인의 부귀와 지위와 맞부닥치면<SPAN lang=EN-US>, </SPAN>왜 이처럼 돌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SPAN lang=EN-US>? </SPAN>천백년후 권세가 있는 성공인사들에게 있어서도 이는 풀기 힘든 난제이다.
진이세<SPAN lang=EN-US>(</SPAN>秦二世<SPAN lang=EN-US>)</SPAN>가 일으킨 박해운동에서<SPAN lang=EN-US>, </SPAN>이사와 조고는 음모를 꾸민 사람들이다<SPAN lang=EN-US>. </SPAN>시황제의 장남 부소가 속아서 자살하고<SPAN lang=EN-US>, </SPAN>명장 몽염이 피살된다<SPAN lang=EN-US>. </SPAN>시황제의 스무명이 넘는 아들중 누구도 호해의 칼부림을 벗어나지 못했고<SPAN lang=EN-US>, </SPAN>하나하나 제국의 제물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진시황은 당초에 모든 아들들을 정치에 관여치 못하게 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유는 중앙집권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SPAN lang=EN-US>. </SPAN>그런데<SPAN lang=EN-US>, </SPAN>엄청난 폐단이 나타났다<SPAN lang=EN-US>. </SPAN>즉<SPAN lang=EN-US>, </SPAN>집권자가 권력을 남용하게 되면 모든 사람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고<SPAN lang=EN-US>, </SPAN>결국은 나라 자체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SPAN lang=EN-US>. </SPAN>진이세는 잔혹하게 모든 공자를 살해하고<SPAN lang=EN-US>, </SPAN>백성을 학대했다<SPAN lang=EN-US>. </SPAN>이사는 원래 황제에게 간하려고 하였으나<SPAN lang=EN-US>, </SPAN>그는 진이세가 그를 의심하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황제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꾼다<SPAN lang=EN-US>. </SPAN>그리하여 진이세의 잔혹한 정책은 더욱 미친듯이 시행된다<SPAN lang=EN-US>. </SPAN>그는 심지어 상소를 올려 황제의 황당한 통치이론을 지지하기도 했다<SPAN lang=EN-US>. </SPAN>산동지방에서 이미 봉기가 일어났고<SPAN lang=EN-US>, </SPAN>진승 오광의 부대가 서쪽으로 진군해오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국가가 붕괴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SPAN lang=EN-US>, </SPAN>이사는 조주위학<SPAN lang=EN-US>(</SPAN>助紂爲虐<SPAN lang=EN-US>, </SPAN>폭군 주임금의 학정을 도와주다<SPAN lang=EN-US>)</SPAN>의 길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SPAN lang=EN-US>. </SPAN>국가의 학정을 이용하여 자기의 부귀를 지키려 한 것이다<SPAN lang=EN-US>. </SPAN>이런 방법이 길게 갈 수는 없다<SPAN lang=EN-US>. </SPAN>이사는 이미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SPAN lang=EN-US>, </SPAN>빠져나올 수가 없었다<SPAN lang=EN-US>. </SPAN>미친 정부는 하나의 해적선과 같다<SPAN lang=EN-US>. </SPAN>이사와 같은 대인물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와 정부의 광기에 대하여<SPAN lang=EN-US>, </SPAN>대신들은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SPAN lang=EN-US>, </SPAN>인민은 폭정에 항거할 권리가 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인민들만이 이를 저지할 수 있다<SPAN lang=EN-US>. </SPAN>진이세가 살인유희를 즐기는 동안에 진승<SPAN lang=EN-US>, </SPAN>오광은 산동에서 성공적으로 폭동을 이끈다<SPAN lang=EN-US>. </SPAN>진승의 군대가 서진하여 삼천군을 공격한다<SPAN lang=EN-US>. </SPAN>군태수인 이유는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SPAN lang=EN-US>. </SPAN>조고는 혼자서 조정을 독단했고<SPAN lang=EN-US>, </SPAN>이사가 관여하는 것을 배제했다<SPAN lang=EN-US>. </SPAN>그리하여 그는 이 사건을 교묘히 이용하여<SPAN lang=EN-US>, </SPAN>하룻밤만에 이유는 방어에 무능한 사람에서 적과 내통한 사람으로 바뀐다. 승상 이사와 그 일가는 모조리 감옥에 갇혀버린다.
감옥에서 이사는 여전히 노력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그와 황제의 사이에는 일찌감치 조고가 놓은 큰 산과 바다가 놓여 있었다<SPAN lang=EN-US>. </SPAN>결국 조고의 뜻이 황제의 입을 통하여 나타나고<SPAN lang=EN-US>, </SPAN>이사는 인생의 끝장을 만나게 된다. 적과 내통하였다는 죄를 받고 이사의 삼족은 모조리 주살된다.
상채의 한 소리에서<SPAN lang=EN-US>, </SPAN>나중에 대제국의 승상이 된 것은 이사의 노력의 결과였다<SPAN lang=EN-US>. </SPAN>당당한 제국의 승상이 결국 형장에서 요참형을 당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것이 최종결말이다<SPAN lang=EN-US>. </SPAN>이사가 피할 방법은 없었을까<SPAN lang=EN-US>? </SPAN>죽기전에 이사는 돌연 상채를 생각하고<SPAN lang=EN-US>, </SPAN>상채에서 편안히 지내던 때를 생각한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SPAN lang=EN-US>, </SPAN>죽음 앞에서<SPAN lang=EN-US>, </SPAN>상채에서 누렁이를 데리고 들토끼를 잡으러 다니던 광경이 갑자기 그렇게 행복하게 보이고 그리워진 것일까<SPAN lang=EN-US>? </SPAN>일생동안의 분투는 당연히 이런 결과를 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SPAN lang=EN-US>, </SPAN>일체는 모두 상채소리가 비천하고 가난한 처지를 벗어나려는데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줄을 잘못 선 전형적인 사례가 이렇게 벌어졌다.
이사의 일생은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SPAN lang=EN-US>? &lt;&lt;</SPAN>이사열전<SPAN lang=EN-US>&gt;&gt;</SPAN>을 읽어보면<SPAN lang=EN-US>, </SPAN>이사가 죽기전에 한 반성은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다<SPAN lang=EN-US>. </SPAN>설마<SPAN lang=EN-US>, </SPAN>상채의 소리는 처지를 바꾸기 위하여 노력하지 말았어야 한단 말인가<SPAN lang=EN-US>? </SPAN>설마<SPAN lang=EN-US>, </SPAN>이사는 제국의 성장을 돕지 말고<SPAN lang=EN-US>, </SPAN>제국의 통일을 돕지 말았어야 한단 말인가<SPAN lang=EN-US>? </SPAN>분명히 그것은 아니다<SPAN lang=EN-US>. </SPAN>제국의 승상으로서 시황제가 죽은 이후<SPAN lang=EN-US>, </SPAN>이사는 제국의 전체와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하여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았고<SPAN lang=EN-US>, </SPAN>자기의 부귀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생각이 더 강했다<SPAN lang=EN-US>. </SPAN>한 상채소리의 사고가 제국승상의 두뇌를 지배한 것이다<SPAN lang=EN-US>. </SPAN>만일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SPAN lang=EN-US>? </SPAN>수십년의 승상이라면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자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SPAN lang=EN-US>. </SPAN>그가 시황제의 유지를 받들려고 했다면 어쨌든 방법이 있었을 것이고<SPAN lang=EN-US>, </SPAN>합법적으로 집행할 방법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SPAN lang=EN-US>. </SPAN>설사<SPAN lang=EN-US>, </SPAN>호해<SPAN lang=EN-US>, </SPAN>조고가 죽어라 방해하더라도<SPAN lang=EN-US>, </SPAN>어쨌든 한번 죽을 뿐이잖은가<SPAN lang=EN-US>. </SPAN>당당한 제국의 승상이라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이다<SPAN lang=EN-US>. </SPAN>황제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저지하기 위하여 이사가 순국하였다면 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지 않겠는가?
 그러나<SPAN lang=EN-US>, </SPAN>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SPAN lang=EN-US>. </SPAN>이사에게 있어서<SPAN lang=EN-US>, </SPAN>성공도 상채소리때문이었고<SPAN lang=EN-US>, </SPAN>실패도 상채소리때문이었다<SPAN lang=EN-US>. </SPAN>한 사람의 초기경력은 이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이사(李斯)는 왜 조고(趙高)에게 패하였는가?"

이사(李斯)는 역사적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nbsp; 이사의 성공은 휘황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사가 역사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성공에 있지 않고, 그의 실패에 있다.
이사의 실패는 수천년후의 사람들까지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p>
<p>&nbsp;</p>
<p>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정치철학자인 순자(荀子)의 애제자였다.
요즘으로 따지면 당대의 대학자로부터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개 환관의 손에 무너진다. </p>
<p>&nbsp;</p>
<p>외국인으로서 그는 불원천리 진나라까지 왔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인생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만일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하였으므로 "천고일제(千古一帝)"로 불릴 수 있다면, 이사는 "천고일상(千古一相)"으로 불리워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진시황은 그의 말이라면 기본적으로 모두 따랐다.
군신간의 관계나 취득한 성과에 비추어볼 때 중국역사상 최고라고 할만하다.
그의 공이 높기는 했지만, 주군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어서,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도 그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에 대한 신임은 더 이상 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사는 진이세의 등극에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이세는 그가 모반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결국은 그가 모반했다고 믿었다.
진2세가 즉위하자 1년만에 그를 옹립한 공신을 몰아냈는데, 이것도 역사상 드물게 보는 경우었다.</p>
<p>&nbsp;</p>
<p>이사는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대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의 행위는 후안무치한 정객과 다름없기도 했다.
이사의 재주, 학문, 수완은 모두 역사상 제1류급이었다. </p>
<p>&nbsp;</p>
<p>이사는 그렇다면 왜 일개 환관인 조고에게 패하였는가?
우리가 아래의 몇가지 점을 이해한다면 이 문제에 대하여 이해하기가 쉬워질 수 있을 것이다.</p>
<p>&nbsp;</p>
<p>첫째, 이사는 조고를 적수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조고는 이사를 적수로 생각했다.</p>
<p>둘째, 조고는 황제의 연락권한을 장악했고, 이사는 황제의 얼굴을 한번 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므로 황제의 앞에서 자신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을 고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p>
<p>셋째, 조고는 이익과 위협을 통해서 자기의 세력집단을 만들었으나, 이사는 시종 자기의 세력집단을 만들지 않았다.</p>
<p>&nbsp;</p>
<p>먼저 첫째 이슈에 대하여 살펴보자.</p>
<p>&nbsp;</p>
<p>진시황때, 이사의 지위는 이미 최고급에 달하였다.
더이상 오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고는 신분이 환관이고 인품은 소인이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신분을 상승시키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사는 지켜야 했고, 조고는 빼앗으려 한 것이다.
이것은 이사도 알고 있었다.
한가지 이사가 몰랐던 점은 조고의 야심이다.
그의 야심은 이사가 생각했던 것처럼 작지가 않았던 것이다.
즉, 이사는 조고를&nbsp;저평가했었다.
조고의 최종목적은 최소한 조정의 대권을 독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고는 이사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사는 "지기부지피(知己不知彼)"했던 것이다.</p>
<p>&nbsp;</p>
<p>이사가 사구(沙丘)에서 조고에 협력한 것은 조고의 분석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는 몽염을 가장 중요한 적수로 생각했다.
조고와 연합하여 부소와 몽염을 가짜조서로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사는 대진제국의 정계에 자기의 적수는 없어졌다고 믿었다.</p>
<p>&nbsp;</p>
<p>이사는 스스로 이 방법이 괜찮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확실히 그랬다.
공로와 재능에서 누가 그와 비교될 수 있단 말인가.
황제도 자기가 조서를 고쳐서 옹립한 것이므로 자기에게 감사할 것이고, 자기를 신임할 것이고, 자기에 의지할 것이다.
오랫동안 부귀를 누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p>
<p>&nbsp;</p>
<p>다만, 이사는 한가지를 잘못했다.
그리고 이는 치명적인 잘못이었다.</p>
<p>&nbsp;</p>
<p>정치적으로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수가 된다.
조고는 이사와의 결맹을 통하여&nbsp;진이세를 옹립하는데 성공한 이후, 즉시 이사를 최대의 적수로 생각했다. </p>
<p>&nbsp;</p>
<p>이사의 측면에서는 진시황이 사구에서 죽은 이후, 만일 그가 적극적으로 조고가 그에게 권유한 이유를 생각해냈다면, 자신의 장기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조고와 연합하여 조서를 위조하여 호해를 진이세황제로 옹립하는 것이지만, 호해를 옹립하는데 성공한 이후에는 반드시 즉시 손을 써서 조고의 세력을 제거해야 했다.
심지어 조고를 죽여버려야 했다.
그러나, 이사는 이렇게 하지 않았고, 이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p>
<p>&nbsp;</p>
<p>그는 피동적으로 조고의 음모를 받아들였다.
역사는 "이사가 조고와 연합하여, 사구의 변을 일으켰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역사는 "조고가 이사와 연합하여, 사구의 변을 일으켰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후, 이사는 피동적인 지위에 놓이고, 주동적으로 큰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p>
<p>&nbsp;</p>
<p>이사는 자기가 이미 조고의 가장 주요한 정치적인 적수가 되었다는 것을 안 이후에도, 여전히 조고를 얕잡아 보았다.
그는 자기가 승상의 존귀함과 옹립의 공을 가지고 조고에 대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조고를 눈아래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한번 두번 기회를 잃었고, 결국은 국면을 역전시킬 수 없게 되었고, 수습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그제서야 그가 황제에게 조고가 모반을 하려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무고였다.
이사는 조고가 모반하려한다는 증거를 하나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p>
<p>&nbsp;</p>
<p>이사는 급하게 되자 아무나 막 문 것이다.
만일 그가 맑은 정신이었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p>
<p>&nbsp;</p>
<p>원인은 그 자신에 있었던 것이다.</p>
<p>&nbsp;</p>
<p>둘째 이슈에 대하여 살펴보자.</p>
<p>&nbsp;</p>
<p>당초 사구에 있을 때, 조고는 이사에게 묻는다:
"만일 부소가 후계자가 된다면, 신황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당신과 몽염을 비교하면 어떤가?"
이사는 "상대가 안된다"라고 답변한다.</p>
<p>&nbsp;</p>
<p>이사는 일찌기, "호해가 즉위한 후 신황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와 조고를 비교하면 어떤가?"라는 문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p>
<p>&nbsp;</p>
<p>진이세가 즉위한 후, 오랫동안 신하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는 거의 조고로부터 듣는 국가정세보고만을 믿을 뿐이었다.
조고는 극력 진이세가 황당한 놀이와 유희를 즐기도록 종용하고 있었다.</p>
<p>&nbsp;</p>
<p>옹립에 큰 공이 있는 이사는 오히려 황제를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사도 알 고 있다.
그렇다면 이사에게는 무슨 희망이 있는가?
서면보고서를 한장 달랑 써서 황제에게 올리면, 황제가 자신을 믿어줄 것으로 생각했단 말인가?</p>
<p>&nbsp;</p>
<p>황제는 보고서를 받아보고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조고가 먼저 네가 모반한다고 얘기했는데, 너는 나중에야 조고가 모반한다고 얘기한다. 나는 너의 말을 못믿겠다."
"조고는 내가 매일 보고 있고, 그의 건의는 모두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인데, 어찌 모반을 한단 말인가"</p>
<p>&nbsp;</p>
<p>이사는 당초 순자에게서 배운 것이 제왕지학(帝王之學)이었다.
그는 진시황과의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성공을 거두었고, 진시황의 신임을 받았다.
진이세의 아래에서 그는 제왕학의 기본을 써먹을 기회조차 없었다.
이사는 진이세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p>
<p>&nbsp;</p>
<p>황제와 관계가 밀접한 사람은 권력중심에 접근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보다 권력투쟁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역대에 총애를 독점하려는 자들은 갖은 방법을 다써서 황제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고 황제의 마음을 알아내려 했고, 황제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황제와의 연락도 자기의 적수를 통해서 한 것이다.
적수가 어찌 너에게 좋은 기회를 넘겨주겠는가?</p>
<p>&nbsp;</p>
<p>셋째 이슈에 관하여 살펴보자.</p>
<p>&nbsp;</p>
<p>이사는 승상의 지위에 있고, 백관의 우두머리였지만, 그의 개인적인 세력집단은 두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진시황이 그를 의심하지 아니한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진시황이 살아있을 때에는 황제의 완전한 신임을 가지고 이사는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한비자가 나타났을 때에도 이사는 약간의 수법을 써서 이 위협을 제거했다.
이사에게는 붕당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p>
<p>&nbsp;</p>
<p>시황제가 살아있을 때는 붕당을 만들 수도 없었다.
만일 발각되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황제는 죽었다.
신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것은 이사 자기가 아니다.
이 점에 대하여 이사는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에 틀림없다.
만일 깊이 생각했다면, 적어도 적절한 조치를 취했어야 옳다.</p>
<p>&nbsp;</p>
<p>조고는 이미 자기의 정치상 최대의 적수가 되었으므로, 조고의 세력이 팽창하기 전에, 즉시 자기의 세력집단을 건립해야 했다.
이사의 지위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p>
<p>&nbsp;</p>
<p>비록 법률상 황제가 최고권력을 가졌지만, 이사는 알고 있었다.
권력은 운용의 묘에 있다는 것을.
진이세가 처음 등극하여, 아직 경험이 없으므로 이사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자기의 사람으로 조정을 채울 수 있고, 조정을 농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p>
<p>&nbsp;</p>
<p>그러나, 이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p>
<p>&nbsp;</p>
<p>그의 적수인 조고는 즉시 자기의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여 신하들을 위협했다.
당연히, 스스로 조고에 의탁한 신하들도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빠른 속도로 이사에 상대하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 집단의 실력이 커지게 되자, 이사는 반격을 생각했지만, 이미 시간은 늦어버렸다.</p>
<p>&nbsp;</p>
<p>이사는 왜 자기의 집단을 조직하지 않았던가?
분석에 따르면 아마도 여불위의 운명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p>
<p>&nbsp;</p>
<p>여불위는 진나라에서 자신의 방대한 정치세력을 건립했고, 이사가 처음 진나라로 왔을 때는, 바로 이 집단에 가담했었다.
그러나, 시황제가 친정을 시작한 이후, 금방 이 집단은 궤멸되었다.
이사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연루되었다.
이사는 여불위집단의 패망을 친히 목격하였다.
그래서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내가 여불위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절대 그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다"</p>
<p>&nbsp;</p>
<p>이런 점을 감안해서 이사의 일생을 살펴본다면, 아마도 더 느끼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p>

불패전신(不敗戰神) 백기(白起) :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


"진왕(秦王) 자영(子嬰)은 어떤 사람인가?"

글: 이치아(李治亞)</P>
<P>&nbsp;</P>
<P>망국지군(亡國之君)을 얘기할 때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갈면서, 그런 사람은 온갖 나쁜 짓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나라의 망국지군은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애(仁愛)하고 절제(節制)하였으며, 총명하고 근신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망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진왕 자영은 가련한 사람으로 여겨진다.</P>
<P>&nbsp;</P>
<P>자영은 인애롭고 절제했다. 진이세 호해가 시해된 후, 조고(趙高)는 자영을 맞이하여 즉위시킨다. 당시의 상황은 진왕조의 영토가 통일이전보다 더욱 작아져 있었다. 그래서 조고는 자영으로 하여금 황제를 칭하지 말고, 왕을 칭하도록 한다. 그래서 진왕이다. 자영이 즉위한 오일후 그는 계책을 세워 조고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모조리 처결한다. 이는 진이세를 위하여 복수한 셈이다. 유방이 먼저 관중으로 들어온 후 패상에 도착한 후 자영에게 투항을 권한다. 그리고 자영의 동의를 얻는다. 자영은 밧줄로 자신을 묶고, 황제어용의 옥새와 병부를 휴대하고 친히 유방의 군으로 나아가 투항한다. 진나라는 자영이 투항하는 순간 정식 종결되었다.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고, 그를 수행한 관리에게 넘겨주어 돌봐주게 하였다. 항우가 함양성에 들어온 후 즉시 자영을 죽이고, 대도살을 진행한다. 이제 진나라의 여러 대에 걸쳐 축적된 것들은 모조리 불태워진다.</P>
<P>&nbsp;</P>
<P>자영은 지혜있는 사람이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진이세 호해가 즉위한다. 진이세는 환관 조고를 총애하여 부소를 사사하고, 많은 엣 신하들을 죽였다. 여기에는 몽염, 이사등이 포함된다. 진2세가 몽염을 해치려고 할 때, 자영은 진이세에게 이렇게 권한 적이 있다: "조왕천(趙王遷)은 이목(李牧)을 죽이고 안취(顔聚)를 임용했고, 제왕건(齊王建)은 그의 전대충신을 죽이고 후승(後勝)을 임묭하였는데, 그 결과 모두 국가의 멸망을 가져왔다. 몽씨는 진나라의 대신이고 모사이다. 폐하께서 일시 그들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신은 개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충신을 주살하고 아무런 덕행이 없는 자를 기용하는 것은 조정 안의 신하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바깥의 장병들의 의지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진이세는 그의 간언을 듣지 않는다. 진이세는 3년간 재위하다가 조고에게 피살당한다. 조고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지지해주지 않자, 자영을 맞이하여 즉위시킨 것이다. 그리고 옥새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조고는 민변이 일어난 후 진나라의 땅이 통일전보다 축소되었으니, '황제'라고 칭하지 말고, '왕'이라고 칭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한다.</P>
<P>&nbsp;</P>
<P>자영은 자세를 낮추는 사람이다. 기원전207년 구월, 조고는 자영으로 하여금 재계(齋戒)를 하도록 시킨다. 종묘로 가서 예를 행하고, 전국옥새를 받도록 한다; 5일이 지난다. 자영은 그의 두 아들 및 신하 한담(韓談)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승상 조고는 이망궁에서 진이세를 죽였고, 여러 신하들이 그를 주살할까봐 겁이 나서 거짓으로 덕이 있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하여 나를 왕으로 세웠다. 내가 듣기로 조고는 초나라와 약정을 했다. 우리나라의 종족을 소멸시킨 후, 토지를 나눠받아 관중에서 왕이 되기로 했다. 현재 나에게 재계를 하라고 하여&nbsp;종묘로 가서 조상에게 제사지내게 했는데, 이는 종묘에서 나를 죽여버리기 위함이다.&nbsp;내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으면 승상이 반드시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가 오면 나는 그를 죽여버리겠다." 조고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요청했지만, 자영은 종묘로 가지 않았다. 과연 그는 친히 재궁으로 온다. 자영은 한담에게 조고를 암살하도록 명령하고, 곧이어 그의 가족들도 모조리 처형한다.</P>
<P>&nbsp;</P>
<P>자영은 아주 시류를 아는 사람이었다. 유방이 진나라말기의 반란군을 이끌고 관중으로 진입했다. 자영은 장병을 보내어 요관에서 유방의 군대를 저지하게 시켰으나,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요관을 우회한다. 귀산을 넘어 남전일대에서 두번이나 진나라군대를 격패시킨다. 기원전206년 십월, 무관으로 진입하고, 패상에 도착한 후 사람을 보내어 자영에게 투항을 권한다. 그리고 자영의 동의를 받는다. 자영은 처자식과 밧줄로 자신을 묶고, 백마가 끌고 가는 흰색 마차에 앉았다. 몸에는 장례식때 입는 흰색옷을 입었다. 그리고 황제의 어용물품(전국옥새와 병부를 포함함)를 휴대하여 지도(軹道)에서 친히 유방의 군대 앞으로 나아가 투항한다. 자영은 모두 46일간 진왕으로 있었다. 진왕조는 자영이 투항하는 순간 정식 멸망한다. 번쾌는 자영을 죽이자고 하지만,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수행한 관리에게 넘겨서 보살피게 한다. 그러나 결국, 항우가 함양성에 들어온 후, 즉시 자영을 죽이고, 대도살과 방화를 시작한다.</P>
<P>&nbsp;</P>
<P>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왜 망국지군이 되었을까? 심지어 다른 사람의 도하귀(刀下鬼)가 되었을까?</P>
<P>&nbsp;</P>
<P>첫째, 진시황의 포학. 진시황은 비록 천하를 통일하였고, 육국을 멸망시켰지만, 아주 잔폭했다. 일찌기 끝도 없이 세금을 거두고 부역을 시킨다. 장성을 쌓고, 궁전을 건설하며, 능침을 만들었으며. 변방을 지키게&nbsp;하였다.&nbsp;전란의 고통에서 막 벗어난 많은 농민들로 하여금&nbsp;다시 한번 힘든 노역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아방궁과 여산묘를 만들기 위하여 진시황은 전국각지에서 모두 70여만명의 민공을 소집한다. 무수한 재물을 쏟아부었으나, 전국인민의 반발에 부닥친다. 기원전211년, 동군에서 진시황을 욕하는 엄중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해에, 운석이 동군에 떨어졌다. 어떤 사람은 진시황을 미워하였으므로, 그 위에 몰래 7개의 글자를 새겨 넣는다: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진시황은 누가 운석에 글을 새겼는지 조사하도록 시킨다. 어사대부가 그곳으로 가서 조사하였으나 밝히지 못한다. 그래서 아예 운석 부근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P>
<P>&nbsp;</P>
<P>둘째, 진이세의 혼용(昏庸). 진시황의 웅재대략과 달리, 진이세는 혼용한 군주였다. 즉위초기에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그 후에 조고의 건의를 받아, 승상 이사를 죽인다. 그리고는 지록위마의 조고를 기용한다. 마침내 스스로 조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은 조고의 무리에 의하여 핍박받아 자결하게 된다.</P>
<P>&nbsp;</P>
<P>셋째, 항우의 포학. 항우는 비록 진왕조를 무너뜨렸지만, 진왕조의 통치와 비교하면, 그는 지나치면 지나치지 덜하지 않았다. "신안성의 남쪽에서 밤에 공격하여 진나라병졸 이십여만명을 갱살시켰다." 같은 반란군지도자이지만, 유방은 함양에 들어간 후 전혀 주민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는 병력을 이끌고 함양을 도살한다. 투항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궁전을 불태운다. 불은 석 달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재물과 부녀를 마차에 싣고 갔다. 그가 지나간 곳은 부서지고 망가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P>
<P>&nbsp;</P>
<P>반고는 자영을 아주 동정할만하고 존중할만하다고 말한다. "내가 &lt;진기(秦紀)&gt;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車裂)에 처한 것을 보고는 그의 결심과 그의 뜻이 가상하다. 자영은 생사의 도리를 알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만일 부친과 형이 남긴 극악한 유산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자신도 죽고 나라도 망하는 최후는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대왕조에는 모두 창업때는 전전긍긍 극근극검하다가, 일단 대권을 손에 잡으면, 왕왕 백성을 도적처럼 여기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후손들이 일패도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P>
<P></P>

"이사(李斯)는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가?"

글: 위석아(危石兒)

이사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그는 이름없는 하급관리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탁월한 정치적 재능과 식견을 가지고, 한걸음 한걸음 진나라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유명'한 환관 조고에 의하여 모반죄로 처형당한다.
처형은 "구오형(具五刑), 주삼족(誅三族)"으로 했다.
실로 비참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구오형,주삼족"은 도대체 어떤 형벌일까?
도대체 얼마나 잔혹했을까?
"주삼족"은 삼족을 주살하는 것으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진정 이사의 몸에 행해진 것은 "구오형"이다.
"구오형"은 시간으로 나누면, 노예사회의 구오형과 봉건사회의 구오형이 있다.
이사는 중국봉건사회의 시작시기에 살았으므로, 그가 받은 "구오형"은 여전히 노예사회의 "구오형"이었다.
"구오형"은 "경(黥), 의(劓), 월(刖), 궁(宮), 대벽(大辟)"이다.
그외에 한서.형법지의 기재에 따르면, "해(醢), 태살(笞殺), 단설(斷舌)"등이 있다.
형법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두 먼저 경, 의, 참좌우지(斬左右趾), 태살지(笞殺之), 효기수(梟其首), 저기골육어시(菹其骨肉於市). 기비방리주자(其誹謗詈詛者), 우선단설(又先斷舌). 고위구오형(故爲具五刑)"
아래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들 잔혹한 형벌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경:
경형(黥刑)은 묵형(墨刑)이라고도 한다.
먼저 날카로운 칼날로 점인의 얼굴을 벤 다음 먹물을 묻힌다.
상처가 나으면, 짙은 검은 색의 상처가 남는다.
이런 형벌은 우리가 TV드라마에서 자주 본다.
예를 들어 수호전의 무송, 임충등.
의:
의(劓)는 회의자(會意字)이다.
의형은 모양그대로 칼로 범인의 코를 베어내버리는 것이다.
월:
월(刖刑)은 바로 사람의 다리를 잘라버리는 것이다.
어떤 때는 손도 포함된다.
그것은 행형관의 마음이다.
궁:
이건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태감(환관)이 되려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궁형은 일종의 형벌이고, 주로 음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하여 생식기를 파괴하는 형벌이다.
대벽:
즉 사형이다.
이것은 '구오형'중 가장 핵심인 형벌이다.
대벽의 구체적인 수단은 고정적이지 않다.
형을 집행하는 사람의 '기호'에 따른다.
머리를 벨 수도 있고, 교살형으로 할 수도 있고, 오마분시(五馬分屍)할 수도 있다.
해:
해형은 비교적 잔인한 형벌이다.
이는 처음에 살아있는 사람을 절구에 넣어서, 굵은 나무방망이 혹은 쇠방망이로 찧어서 죽이는 것이다.
아마도 형벌집행자가 이런 형벌은 너무나 잔인하다고 여겨서인지 나중에는 먼저 사람을 죽인 후에 그의 시신을 나누어 다시 절구에 넣고 찧어서 고깃덩이로 만들었다.
태형:
태살은 '해'에 비하여 '온유'한 방법이다.
그것은 사람의 옷을 모두 벗기고, 곤장으로 때려서 죽이는 것이다.
단설:
이 형벌은 함부로 지껄이거나 지도자를 비방하는 사람의 혀를 잘라버리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대증하약(對症下藥)'의 형벌이다.
이사는 모함을 받은 후 이런 '구오형'을 받았다.
실제로는 8가지 형이다.
그외에 이사는 "요참어시(腰斬於市)"된다.
즉, 이사는 죽을 때까지 9가지의 형벌을 받았다.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다고 할 것이다.

사마착의 서진 vs 장의의 동진

작자: 일명(佚名)



기원전316년, 상앙(商鞅) 변법이후 20여년이 지난 진나라는 동쪽으로 갈 것인가, 서쪽으로 갈 것인가의 전략적 방침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간다는 것은 전략핵심지역으로 들어가 전략중심요지를 탈취한다는 것이고;

서쪽으로 간다는 것은 풍부한 자원을 취득하여, 강국으로서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것이다.

귀곡자(鬼谷子)의 제자인 장의(張儀)는 동쪽으로 갈 것을 주장했다;

한나라를 타격하고, 초나라와 위나라를 약화시키며 전략중심지역인 주왕조(周王朝)를 통제해야한다는 것이다.

진나라가 우두머리가 되려면,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으로 발전해야 하고, 천하의 전략요충지 제고점(制高點)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의가 내세운 말은 "쟁명자어조(爭名者於朝), 쟁리자어시(爭利者於市)".

즉 '이름'을 다투는 자는 조정으로, '이익'을 다투는 자는 시장으로 간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명리'를 다투려면 명리가 집중된 곳, 즉 주왕실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이는 '쟁명리(爭名利)'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착은 동쪽으로 가는데 반대한다.

그는 서쪽으로 갈 것을 주장한다.

그는 3가지 이유를 들어 서진의 필연성을 얘기한다:

나라가 우유해지려면 반드시 광활한 토지자원이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

나라가 강대해지려면, 반드시 충분한 국민의 재물로 군사력을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만일 왕업을 이루려면 반드시 건전하고 우량한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사마착은 더 나아가 서진의 타당성까지 분석했다.

파촉은 지역이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하며, 인구는 희소하다.

그러나, 관리가 혼란스럽고, 역량이 약소하여 군사적으로 정복하기 쉽다.

싸우게 되면 시랑이 양떼를 모는 것과 같이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정복할 수 있다.

투입은 적고 수익은 크다.

그러면 영토는 크게 증가되고, 재물도 바로 크게 증가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리스크가 적다는 것이다.

이 토지는 동쪽으로 육국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서벽지국(西僻之國)'이다.

이 땅을 공격해서 차지하더라도 제후들간에 큰 분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수익성이 좋은 땅을 차지하는데 아무런 리스크도 없고, 큰 댓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현재의 용어로 말하자면, '저가'로 서부를 M&A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경쟁이 치열한 동부제후국으로 진출하려면 한나라를 침략하고, 주천자를 납치했다는 악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고, 도덕적인 압박이 클 것이다.

동방제후의 게임규칙은 이미 성숙되어 있고, 도의는 왕왕 이익과 같이 엮여 있어서, 도의를 잃으면 이익을 잃는 것이 된다.

그래서 동진은 리스크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수익은 낮은 방안이다.

비교한 후에, 진혜왕은 서진을 선택한다.

그해 십월 출병하여 서촉을 정벌한다.

서촉은 진나라의 물자조달기지가 된 것이다.

진나라는 더욱 "강부후(强富厚)"의 국가로 되었다.

이때부터는 동방의 제후국들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사마착이 내놓은 "강부후" 전략이다.

포스트상앙시대에 진나라는 선진적인 체제를 갖추었지만, 만일 사마착의 '서진'전략이 없었더라면, 충분한 자원을 조달받아 지방강국으로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장의의 말을 듣고 모험적으로 동방진출을 꾀했더라면 아마도 피비린내나는 길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몇년 후에 나타난 것이 진시황이 아니라, 제시황, 초시황이 될 수도 있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사마착의 공로는 상앙보다 절대 아래라고 볼 수 없다.

전략요지는 반드시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 아닐 수 있다.

어떤 때는 주변화된 지역일 수도 있다.

그들은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순도가 높고, 투입은 적으며 수확은 크다.

리스크는 적으면서 자신을 배양할 수 있는 전략적인 장점이 있고, 강대하게 해줄 수 있다.

사마착





최근 수정 시각: 2018-01-21 01:54:56
분류

    춘추전국시대/인물

司馬錯 [1]
생몰연대 미상

1. 개요2. 생애3. 후손4.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전국시대 중후반기의 진나라의 명장. 기록 상에는 혜문왕(惠文王) 때부터 언급된다. 그리고 수백년간 진나라를 괴롭혀왔던 파촉(巴蜀)을 기어코 멸망시킨 장수이다.
2. 생애[편집]

기원전 316년에 사마착은 연횡책으로 유명한 장의(張儀)와 설전을 벌인 끝에 결국 10만 병사를 얻어내어, 장의와 함께 진나라 군대를 이끌고, 파나라와 촉나라를 공격하여, 파촉을 멸망시켰다. 촉을 멸망시키고 사천 지방에 봉지를 얻었다.

사마착이 파촉을 멸망시킨 것이 진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었고, 제나라(齊)가 연나라(燕)에게 털려 몰락한 상황에서 초나라(楚)와 비견되는 2강 체제를 구축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한중(漢中)과 파촉을 동시에 먹은 진나라는 양방향으로 초나라를 후려칠 수 있게 되었고, 이후로 촉나라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로 쳐들어가 수도를 함락시켜 천도하게 만들었다. 초나라는 영토가 계속 쪼그라들게 되었다.

기원전 301년에는 촉나라였던 사천 지방에서 촉후인 영휘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고, 기원전 292년에는 백기와 함께 위나라(魏)의 원을 빼앗다가 돌려주며 다음 해에 위나라의 지, 등 땅을 빼았고, 기원전 289년에는 위나라의 원, 하옹을 빼았으며, 기원전 286년에 위나라의 하내 지방을 공격하면서 위나라로부터 안읍을 할양받았다.

기원전 280년에는 농서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사천 지방을 지나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초나라의 검중을 점령한다.

활동 영역으로 보면 남쪽 방면의 군사 행동을 맡은 것으로 보아 정남 장군 비슷한 직책이었던 듯 하다.
3. 후손[편집]

손자 사마근(司馬靳)은 무안군(武安君) 백기를 상관으로 섬겼으며, 장평대전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수송로를 차단해 조나라 군사 40만명을 생매장 비극에 제대로 일조했으며 후손이 그 유명한 사마천이다.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는 초한 시대 항우에게 은왕(殷王)으로 책봉되었던 사마앙(司馬卬)의 후손으로 방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관계없다.
4. 대중 매체에서[편집]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에 따르면 진 소양왕 시절 육대장군 중 하나였다고 설정되어있다. 그리고 육대 장군 중에서는 한 번도 설명이 되어 있지 않는 인물이다 향후에는 설명 할 것 같다,

나름 실제 역사에서도 활약한 인물인데 작중 언급이 아예 없다.

[1] 錯이라는 한자가 뜻과 음이 '어긋날 착' 말고도 '둘 조'라고도 읽히기에 사기 본기 번역본을 보면 좌경 조니 사마착이니 뭐니 혼돈되게 표기되어있지만, 모두 동일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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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

고대 중국 지역구분

고대 중국 지역구분

요하 유역은 요녕입니다. 지금도 이 지역의 성이름이 요녕성(랴오닝성)이죠. 이 요하를 기준으로 동쪽은 '요동', 서쪽은 '요서', 우리에게는 요녕이라는 이름보다는 요동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겁니다. 중국은 이 요하 동쪽땅을 동이족이 사는 땅으로 인식했다고 하니까요.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요녕지방은 중원의 일부였던 적이 많습니다. 힘이 약해지면 고구려, 여진족(만주족) 등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구요.
하(황하)를 기준으로 북쪽은 말그대로 하북입니다. 지금도 이 지역의 성이름은 하북성(허베이성)이죠. 고대 중국에서는 가장 생산성이 좋았던 지역입니다. 왜냐하면 황하는 원래 지금의 베이징 쪽으로 흘렀다고 합니다. 베이징까지 바다였구요. 황하가 계속해서 기름진 흙을 퍼날르면서 충적평야가 형성되었고 황하는 계속 남하한 것이죠. 황하가 만든 가장 기름진 땅이었다는 말.
삼국지 시대에는 원소와 공손찬이 이 지역의 패권을 두고 무려 7년을 싸웠죠. 그리고 승리한 원소는 하북의 패자이자 중원 전체의 최강자가 되었으니... 그만큼 하북이 당시에는 엄청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말. 하북지역의 남쪽중심은 "업", 북쪽중심은 "계"가 되었겠습니다. 하남의 조조도 원소를 이기고 난다음 자신의 세력기반을 업으로 옮기게 되죠. 이 업이 있는 지역이름이 위(魏)입니다. 이는 나중에 그대로 국가명 위로 이어집니다.
그럼 당연히 하(황하)의 남쪽은 하남이겠죠. 역시 지금 이지역의 성이름은 하남성(허난성)입니다. 이 지역의 중심은 허창이고 삼국지 시대 '조조'의 주 세력지가 되겠습니다. 하남을 평정한 조조와 하북을 평정한 원소가 황하근처에서 격돌한 것이 그 유명한 "관도대전"이구요.
산동은 원래 태행산맥의 동쪽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화북평원 전체를 의미하죠. 유방이 항우를 이긴다음 수도를 어디로 할까 정할 때도 유방의 부하들은 모두 산동사람인지라 낙양을 수도로 하길 원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하지만 현대로 오면 올수록 그 의미가 줄어 현재의 산동반도와 태산일대를 말하는 명칭으로 의미가 축소됩니다., 산서(삼국지시대 이름은 "병주") 는 태행산맥 서쪽이라고 해서 산서. 지도를 보면 하북지역과 구별되는 산지가 눈에 보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산동에는 제(齊)나라가 있었고, 산서에는 진(晉)나라가 있었구요. 진시황의 그 진(秦)과는 다른 나라입니다. 삼국지시대에는 다 원소세력권.
황하를 보면 북에서 아래로 흐르는 구간이 있습니다. 바로 산서 왼쪽 구간인데요. 이 구간을 기준으로 산서지방을 하(황하)의 동쪽이라고 해서 하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네요. 서쪽은 당연히 하서. 관우가 하동사람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말하는 하동이 바로 이뜻입니다. 관우는 산서지방(병주)사람인거죠.
'귤이 회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회하는 옛날부터 중국의 남부와 북부를 나누는 기준으로 굉장히 중요했죠. 회하 북쪽은 밀가루문화, 남쪽은 쌀문화이기도 하구요. 남북조 시대, 남송시대 모두 남북의 경계는 이 회하가 기준이 됩니다. 이 회하의 남쪽지역회남이라고 합니다.
회남의 주축도시는 '수춘'이었고 삼국지시대에는 원술의 주무대였죠. 그리고 이 지역의 또다른 세력은 하비(서주)의 여포. 그래서 삼국지를 보면 항상 여포와 원술이 서로 싸워야 하냐 힘을 합해야 하냐가 고민거리고 등장합니다. 결국 이 둘은 끝장나게 싸웠고, 서로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한 상태에서 하남의 조조에게 각개격파당합니다.
남쪽의 양쯔강과 회하 유역을 합쳐서 강회(江淮)라고 부르는데 남북조시대 이후 이 강회지역의 생산량은 하북을 능가하게 됩니다. 능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의 부는 다 강회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하지만 삼국지시대에는 이 지역의 치수가 불안정해서 농사짓기 적합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지금의 장쑤성인데 장쑤성은 전체 지역의 18%가 물이라고 합니다. 이 물들이 북쪽 세력의 남방진출을 막는 경계역할을 했고 동시에 치수가 가능해진 이후로는 농업생산의 원동력이 된거죠.
강동은 말그대로 강의 동쪽. 양쯔강을 잘보면 좀 쉬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건업(난징)이 강의 동쪽에 있죠. 이 지역을 오라고 하고 지역적으로는 강동이라고 부르는. 손견의 별명이 강동의 호랑이였다죠. 강남이 양쯔강 남쪽을 의미하면 굉장히 광역적인 표현이라면 상대적으로 강동은 좀 지엽적인 표현입니다.
관중이라는 이름보다는 장안이라는 도시이름이 더 유명할겁니다. 진, 전한, 당의 중심지였던 지역. 사천을 기반으로 관중을 점령한 유방은 하남, 회남의 항우와 격돌하게 되는데.... 초한지나 사기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지역인데 이상하게 삼국지에서는 비중이 없는 지역입니다. 이각과 곽사가 아주 개판을 쳐놨더랬죠. 이후 조조가 종요를 보내 지배하게 합니다. 1000년 넘게 중국의 중심이었던 지역인데 지금은 토지생산성이 많이 떨어지고 또 위치가 너무 내륙이라 중국의 중심과는 한참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관중이라는 이름은 저 이역의 사방을 지키고 있는 관들의 중심이라는 의미입니다. 4개 관(관중 또는 관중 분지, 관중 평원(關中平原)은 역사적으로 북쪽의 소관,동쪽의 함곡관,남쪽의 무관,서쪽의 대산관 사이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현재의 중국 산시 성 중부와 허난 성 서단을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관문은 관중과 화베이 평원을 분리하는 동쪽의 함곡관이었다.)우리에게는 동쪽 낙양으로 가는 길에 있는 "함곡관"이 가장 유명하죠.
서량은 관중의 서쪽지역. 삼국지에서는 마등(마초)와 한수의 본거지. 동쪽의 요녕과 비슷한 위치로 중원의 힘이 약해지면 이민족들이 가장먼저 점령하는 땅이었습니다. 송나라때는 서하가 여기에 있었죠. 사실 서량이라는 표현은 없다고 합니다. 행정구역명으로 양주인데 건업, 수춘이 있는 양주와 헷갈리니 그냥 서쪽의 량이라고 하여 서량으로 부를뿐.
사천이야 촉나라의 중심지. 익주라고 해야 더 익숙할까요? 굉장히 궁벽한 지역이라곤 하지만 농경지가 넓고 토지생산성이 굉장히 좋은 땅입니다. 현재 중국의 성들 중에서 농업생산성 1위가 사천이라고 하더라구요. 삼국지 시대에는 관중에 비해 생산성이 좀 밀렸던듯한데 이후 완전히 역전.
양쯔강 중류지역은 딱히 지역명이 없네요. 지금은 호북성(후베이성)지역인데, 삼국지시대 행정구역 명은 "형주'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관중을 중심으로 한 진나라가 사천을 점령하고 국력을 키운다음 함곡관 동쪽의 하남, 하북 지역을 하나하나 점령해가면서 통일되죠.
초한지는 사천을 중심으로 관중을 점령한 유방과 하남, 회남을 자기 영역으로하는 항우가 격돌한 전쟁이죠. 그 사이에 유방의 부하 한신은 하북과 산동지역을 점령하고.
삼국지는 하북을 중심으로 산서, 산동을 영위한 원소와 하남을 중심으로 회남, 관중을 영위한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붙은 것이구요. 조조가 승리한 이후 전국통일 하나했더니 강동공략에 실패(적벽대전)하면서 천하는 3분할.
데이몬
2015/01/27 16:14
진(秦)대에 하남(河南)은 지금의 하남일대가 아니라 오르도스(지도에서 관중 북쪽 황하이남 땅)을 의미한다 들었습니다. 몽염의 하남원정이라함은 지금의 하남일대를 원정한게 아니라 관중 북쪽의 넓은 지역에 살던 유목민들을 정벌하고 강 밖으로 몰아낸 것을 의미하는게 그 때문인듯 합니다. 중고세탁기
2015/01/27 16:18
&apos;하&apos;라는 단어자체가 황하 그 자체를 의미하니 여기저기 쓰였을 겁니다. 하동, 하서라는 표현도 있으니까요. 말씀처럼 저 북쪽 황하의 남쪽의 초원지대(오르도스)를 지칭할때 쓰이기도 했겠죠. 그런데 저는 처음알았네요.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apos;강&apos;, &apos;회&apos;, &apos;하&apos;등으로 나누어진 중국의 지역구분 이야기를 하고 싶었떤 것이니까요. 조조는 하의 남쪽 하남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하의 북쪽 하북의 원소와 대치했다는 식으로요.

데이몬
2015/01/27 16:33
중고세탁기 제가 예전에 관련전공쪽 학부 수업에서 중고세탁기 님처럼 하남이란 말의 애매함 때문에 고민하다가 시험 답안지에 &apos;황하 이남&apos;이라고 썼다가 나중에 지적을 받아서 잘 기억합니다.
황하 이남이란 말은 말 그대로 지금의 하남지역까지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 되는데 진나라 때 하남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오르도스 지역을 의미하는 말이니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apos;하남&apos;이라고 하거나 &apos;오르도스&apos;라고 지칭했어야 했다고 피드백을 받았었습니다.
제목을 &apos;고대&apos; 중국의 지역구분이라 하셔서 진나라도 고대라고 할 수 있으니 덧붙여 보았습니다. 태평천하
2015/01/27 16:16
여기에 &apos;음&apos;이니 뭐니 섞이면 아주 환장하겠더군요. 제음은 뭐고 산양은 뭐래... 중고세탁기
2015/01/27 16:18
&apos;음&apos;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버섯모듬
2015/01/27 16:30
중고세탁기 음은 통상 북쪽이고 양은 통상 남쪽이 되죠. 태평천하
2015/01/27 16:31
중고세탁기 저도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저 경우에는 어떤 산의 북쪽과 남쪽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확실치는 않으니 전문가를 소환합니다. 일화
2015/01/27 16:34
강의 경우 북쪽이 양, 남쪽은 음. 산의 경우 북쪽이 음, 남쪽은 양.
햇빛이 어느 쪽에 잘 비치는 지가 기준입니다. 어렵지 않아요. 데이몬
2015/01/27 16:39
그게 산 남쪽은 햇볕을 잘 받고 산 북쪽은 산의 그림자 때문에 남쪽보다 어두워서 남쪽을 양, 북쪽을 음이라고 하는 것인데 산과 산 사이 골짜기 같은 지형에도 음이라고 붙이더군요. 중고세탁기
2015/01/27 16:41
일화 이게 확실히 일정치 않은가 봅니다. 낙양은 분명히 강의 남쪽에 있는데 낙&apos;양&apos;인 것을 보면. 일화
2015/01/27 16:47
중고세탁기 이름 그대로 낙수의 북쪽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황하보다 남쪽이라고 착각하시면 안되죠.

안쿤
2015/01/27 17:47
심양이나 한양을 보면 도시가 강 북쪽에 있어서 양이 붙죠

뼈다구발굴단
2015/01/27 16:17
감사합니다!

대동세상
2015/01/27 16:37
장안은 이후 서위/북주시대에 개발이 다시 시작되어 수/당대에 다시 한번 천하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안록산의 반란이후 절도사들의 난립이 시작된 당중기부터는 강남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형세가 되다가 주전충이 장안을 파괴하고 낙양으로 천도(어쩐지 누군가가 생각나는군요...)한 이후 중국사에서 비중이 크게 줄었지요.

일화
2015/01/27 16:38
요하의 서쪽은 요서(백제가 진출했니 마니 하는 그 곳)이지, 요하가 아니죠. 오타인 듯 합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apos;하&apos;는 황하 이외에는 잘 붙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apos;~수&apos;라고 하죠. (회하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고세탁기
2015/01/27 16:40
아 이런 오타 맞습니다. 수정해야지... 일화님 말씀을 들으니 "~수" 즉 "회수"가 더 적합한 것이 맞는듯한네요. 말씀처럼 하는 황하를 지칭하니까요. 하지만 그림파일인지라 수정은 어렵고.... 그냥 봐주세요.

데자뷰
2015/01/27 18:17
일목요연하게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추천 꾸~욱...

이찬성
2015/01/28 07:45
잘 배우고 갑니다. 추천도 같이

이만갑
2015/01/28 17:58
감사합니다!

타브가치
2015/01/28 21:19
음? 지도의 강동은 보통 "강남"으로 불리는 게 더 일반적이지 않나요?

중고세탁기
2015/01/28 21:36
강남은 본문에더 썼지만 더 넓은 지역을 가르킨다고 봐서요.

대동세상
2015/01/29 05:35
중고세탁기 삼국지식으로 표현하자면 강동은 양주일대를 일컽는 표현이고, 강남은 더 넓게 남형주+양주+교주일대를 모두 포함해서 일컽는 표현이려나요?^^

쪽빛고래
2015/01/30 14:53
그동안 중국역사를 보면서도 지역에 대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정리를 이리 해주시니 감사하네요.ㅎㅎ 스크랩을 해가고 싶지만 안되서 아쉽습니다.^^

야스페르츠
2015/01/31 08:23
산동이 지금의 산동성, 그러니까 태산 동쪽을 가리키게 된 것은 고대가 아니라 근대의 일입니다. 고대 기준으로 산동은 태행산맥의 동쪽을 말합니다. 효산 동쪽이라는 말도 있고, 대략 산동=관동 같은 의미로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중고세탁기
2015/01/31 12:16
네 산동은 태행산맥 동쪽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그건 너무 광역적인 의미인지라서요. 태산 동쪽 산동은 당시에도 쓰인 것으로 알고 썼는데 아닌가 보죠?

BAKARA
2015/02/18 10:25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출처] 고대 중국의 대충 지역구분...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중고세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