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30.

금사(金史) 사묘아리(斜卯阿里) 열전 국역 1부 금사 번역

금사(金史) 사묘아리(斜卯阿里) 열전 국역 1부 금사 번역

안녕하십니까. 길공구입니다.
북송말, 요말, 금초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 열전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저번에는 요금 전쟁의 주요 단초를 제공하였던 아소 열전과 
송금 전쟁의 주요 단초를 제공하였던 동관 열전과
송사에 진 만인적이라고 기록된 북송 말, 남송 초 명장 한세충과
단기로 금군 진영에 뛰어 들어가 수백 명을 죽이고 돌아온 송나라 양재흥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오늘은 금초의 맹장으로 고려와 여진의 갈라전 싸움에서 고려군을 격파한 사묘아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금사(金史) 아소(阿疏) 열전 국역 http://gil092003.egloos.com/565368
송사(宋史) 동관(童貫) 열전 국역 [방랍(方臘) 열전 포함] http://gil092003.egloos.com/575729
송사(宋史) 한세충(韓世忠) 열전 국역 1~3부 http://gil092003.egloos.com/578283
송사(宋史) 양재흥(楊再興) 열전 국역 http://gil092003.egloos.com/578289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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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묘아리(斜卯阿里)

斜卯阿里,父渾坦,穆宗時內附,數有戰功。
阿里年十七,從其伯父胡麻谷討詐都,獲其弟沙里只。
高麗築九城於曷懶甸,渾坦攻之,遇敵於木里門甸,力戰久之,阿里挺槍馳刺其將於陣中,敵遂潰。
渾坦與石適歡合兵于徒門水,阿里首敗敵兵,取其二城。
高麗入寇,以我兵屯守要害,不得進,乃還。
阿里追及于曷懶水,高麗人爭走冰上,阿里乘之,殺略幾盡,遂合兵于石適歡。
道遇敵兵五萬,擊走之。
又與石適歡遇敵七萬,阿里先登,奮擊大敗之。
石適歡曰:
「汝一日之間,三破重敵,功豈可忘。」
乃厚賜之。
사묘아리(斜卯阿里)는, 부(父)는 혼탄(渾坦)이며, 목종(穆宗/영가盈歌) 때 내부(內附/귀순하여 붙음)하였고,
수차례 전공(戰功)이 있었다.
사묘아리(斜卯阿里)는 17세에, 그 백부(伯父) 호마곡(胡麻谷)을 따라 사도(詐都)를 토벌(討伐)하였고,
그 (사도의) 동생 사리지(沙里只)를 포획(捕獲)하였다.
고려(高麗)가 갈라전(曷懶甸)에 9성(城)을 축성(築城)하자, 혼탄(渾坦)이 공격(攻擊)하였는데,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적(敵)과 만나, 오랫동안 역전(力戰/힘껏 싸움)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정창(挺槍/창을 겨누어 듦)하여 (고려의) 진중(陣中)에서 그 장수를 치자(馳刺/질주하여 찌름)하자, 
적(敵)이 드디어 궤멸(潰滅)하였다.
혼탄(渾坦)과 더불어 석적환(石適歡)이 도문수(徒門水)에서 합병(合兵/병을 합침)하였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주장(主將)이 되어 적병(敵兵)을 깨트리고, (고려의) 그 2성을 취(取)하였다.
고려(高麗)가 입구(入寇/적이 쳐들어옴)하자, 
아병(我兵/아군)으로써 요해(要害/요새, 방어가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에 둔수(屯守/주둔하여 수비함)하니, 
(고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고, 곧 돌아갔다.
사묘아리(斜卯阿里) 갈라수(曷懶水)까지 추급(追及/뒤쫓아 따라붙음)하였는데,
고려인(高麗人)이 빙상(冰上/얼음 위)을 쟁주((爭走/다투어 도주함)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 승지(乘之/기세를 탐)하여, (고려군을) 살략(殺略/죽이고 약탈함)하여 기진(幾盡/거의 없어짐)케 하고는,
드디어 석적환(石適歡)과 합병(合兵)하였다.
길에서 적병(敵兵) 5만(萬)과 조우(遭遇)하여(사묘아리가) 격주(擊走/공격하여 나아감)하였다.
또 석적환(石適歡)과 함께 적(敵) 7만(萬)을 조우(遭遇)하자,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선등(先登/선봉으로 공격함)하여, 
분격(奮擊/분발하여 공격함)하여 (고려군을) 크게 깨트렸다.
석적환(石適歡)이 말하길
「네가 하루 동안에 중적(重敵/강한 적)을 세 번 격파(擊破)하였으니, 공(功)을 어찌 가(可)히 잊겠는가.」
이에 후사(厚賜/후하게 하사함)하였다.


斡塞、烏睹本攻駝吉城,阿里鑿墉爲門,日已暮,不可入,以兵守之,旦日遂取其城。
烏睹本以被甲並乘馬賜之。
알새(斡塞)와 오도본(烏睹本)이 타길성(駝吉城)을 공격(攻擊)하였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착용(鑿墉/벽을 뚫음)하여 문(門)으로 하니, 날이 이미 저물어, 들어갈 수가 없자,
병(兵)으로써 지키게 하고는, (다음날) 새벽녘에 드디어 그 성(城)을 취(取)하였다.
오도본(烏睹本)이 피갑(被甲/갑옷을 입힘)하고 겸하여 탈수 있는 말을 하사(下賜)하였다.


從攻下甯江州,授猛安。
又從攻信州、賓州,皆克之。
遼人來攻孛堇忽沙里城,阿里率百餘騎救之。
遼兵數萬,阿里兵少,乃令軍士裂衣多爲旗幟,出山谷間,遼兵望見,遁去。
영강주(甯江州)를 공하(攻下/공격하여 함락함)에 종군(從軍)하니, 맹안(猛安)을 수여(授與)하였다.
또 종군(從軍)하여 신주(信州)와 빈주(賓州)를 공격(攻擊)하였는데, 모두 이겼다.
요인(遼人)이 패근(孛堇/발근勃菫) 홀사리(忽沙里)의 성(城)을 내공(來攻/공격하여 옴)하자, 
사묘아리(斜卯阿里)가 100 여기(騎)를 인솔(引率)하여 구원(救援)하였다.
요병(遼兵)은 수만(數萬)이었고, 사묘아리(斜卯阿里)의 병(兵)은 적었는데,
이에 영(令)하여 군사(軍士)의 옷을 찢어 많은 기치(旗幟/군중의 깃발)로 하고는,
산곡간(山谷間/산골짜기 사이)으로 나오니, 요병(遼兵)이 망견(望見/멀리 바라봄)하더니, 둔거(遁去/달아나 가버림)하였다.

-2부에서 계속-
P.S) 본 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