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30.

금사 맹장 사묘아리(斜卯阿里) 열전 국역2부(완결) 금사 번역

금사 맹장 사묘아리(斜卯阿里) 열전 국역2부(완결) 금사 번역

안녕하십니까. 길공구입니다.
북송말, 요말, 금초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 열전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금초의 맹장으로 고려와 여진의 갈라전 싸움에서 고려군을 격파한 사묘아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2년 만에 연재네요.^^;

금사(金史) 사묘아리(斜卯阿里) 열전 국역 1부 http://cafe.naver.com/booheong/91166


<기타 연재한 열전>
금사 완안진화상 http://cafe.naver.com/booheong/96570

청사고 다이샨[대선] http://cafe.naver.com/booheong/115135
청사고 태조본기 누르하치[노이합제] http://cafe.naver.com/booheong/115015
청사고 추옝[저영] http://cafe.naver.com/booheong/109786
청사고 슈르하치[서이합제] http://cafe.naver.com/booheong/106319
청사고 야르하치[아이합제] http://cafe.naver.com/booheong/106320
청사고 피옹돈[비영동] http://cafe.naver.com/booheong/114916
청사고 호호리[하화례] http://cafe.naver.com/booheong/133229
청사고 어이두[액역도] http://cafe.naver.com/booheong/134175

송사 진만인적 한세충 http://cafe.naver.com/booheong/131779
송사 문인 만인적 이치 http://cafe.naver.com/booheong/104086
송사 동관 [방랍 포함] http://cafe.naver.com/booheong/8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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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에서의 (수호지) 송강 http://cafe.naver.com/booheong/87138

요사 소항덕/소손녕 http://cafe.naver.com/booheong/96881
요사 소태후/예지황후 연연 http://cafe.naver.com/booheong/97224
요사 한쪽 팔을 자른 순흠황후 술율평 http://cafe.naver.com/booheong/111699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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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復州叛,眾至十萬。
旁近女直皆保于太尉胡沙家,築壘爲固。
敵圍之數重,守者糧芻俱盡,牛馬相食其鬃尾,人易子而食。
夜,縋二人出,告急于阿里。
阿里赴之,內外合擊之,破其眾於辟離密罕水上,剿殺幾盡,水爲之不流。
蒲離古胡什吉水、馬韓島凡十余戰,破數十萬眾。
契丹、奚人聚舟千艘,將入於海。
阿里以二十七舟邀之,中流矢,臥舟中,中夜始蘇。
敵船已入王家島,即夜取海路追及之,敵走險以拒,阿里以騎兵邀擊,再中流矢,力戰不退,竟破之,盡獲其舟。
於是,蘇、復州、婆速路皆平。
攻顯州,下靈山縣,取梁魚務,敗餘睹兵,功皆最。
後與散睹魯屯高州,契丹昭古牙、九斤合興中兵數萬攻胡里特寨,阿里以八謀克兵救之。
胡里特先往,敗於城下。
阿里指陣前緋衣者二十餘人曰:
「此必賊酋也。」
麾兵奮擊,皆殺之,餘眾大潰。
來州、隰州兵圍胡里特城,聞阿里來救,即解圍去。
闍母討張覺,有兵出樓峰口山谷間,阿里、散篤魯、忽盧補三猛安擊敗之。
宗望代闍母討張覺,阿里再敗平州兵。
소주(蘇)와 복주(復州)가 배반(叛)하니, 무리가 10만(萬)에 이르렀다.
방근(旁近/근방)의 여직(女直/여진)이 모두 태위(太尉) 호사(胡沙)의 집을 보(保/지킴)하였는데,
축루(築壘/보루를 쌓음)하여 굳게 지켰다.
적(敵)이 수중(數重/몇 겹)으로 포위(圍)하였는데, 
수자(守者/수비하는 자)가 양추(糧芻/양식과 꼴)가 구진(俱盡/모두 없어짐)하니,
우마(牛馬)가 그 종미(鬃尾/말갈기와 꼬리)를 상식(相食/서로 먹음)하였고, 사람도 역자(易子/자식을 바꿈)하고는 먹었다.
야밤(夜)에, 2인이 줄을 매달아 출성(出)하여, 사묘아리(阿里)에게 고급(告急/급함을 알림)하였다.
사묘아리(阿里)가 부(赴/다다름)하니, 내외(內外)가 합격(合擊/함께 공격함)하여,
그 무리를 벽리밀한수(辟離密罕水) 상류(上)에서 격파(破)하였고,
초살(剿殺/끊어 죽임)하여 기진(幾盡/거의 죽음)하니, 물이 그로 인해 흐르지 않았다.
포리고호십길수(蒲離古胡什吉水)와 마한도(馬韓島)에서 무릇 10여 번을 싸워, 
수십만(數十萬) 무리를 격파(破)하였다.
글단(契丹/거란)과 해인(奚人)이 배 1000 소(艘/척)를 취(聚/모음)하여, 장차 바다로 들어갔다.
사묘아리(阿里)가 배 27척으로 요격(邀之)하였는데, 유시(流矢)에 명중(中)되어,
배 가운데에 와(臥/누움)하여, 중야(中夜/한밤중)에 비로소 소생(蘇)하였다.
적선(敵船)이 이미 왕가도(王家島)로 들어갔는데, 곧 밤에 해로(海路)를 취(取)하여 추급(追及/추격하여 이름)하였고,
적(敵)이 달아나 험(險)한 곳에서 거(拒/막음)하니, 사묘아리(阿里)가 기병(騎兵)으로 요격(邀擊)하였는데,
다시 유시(流矢)에 명중(中)하였으나, 역전(力戰/힘껏 싸움)하여 불퇴(不退/물러서지 않음)하였고,
마침내 격파(破)하고는, 그 배를 진획(盡獲/모두 획득함)하였다.
이에, 소주(蘇)와 복주(復州) 및 파속로(婆速路)가 모두 평정(平)되었다.
현주(顯州)를 공격(攻)하였고, 영산현(靈山縣)을 하(下/항복시킴)하였고,
양어무(梁魚務)를 취(取)하였으며, 야율여도(餘睹)의 병(兵)을 패(敗/깨트림)하였는데,
공(功)이 모두 으뜸이었다.
후(後)에 산도로(散睹魯)와 함께 고주(高州)에 주둔(屯)하였는데,
글단(契丹/거란)의 소고아(昭古牙)와 구근(九斤)이 흥중(興中)의 병(兵) 수만(數萬)과 더불어 호리특채(胡里特寨)를 공격(攻)하니, 
사묘아리(阿里)가 8모극(謀克) 병(兵)으로 구원(救)하였다.
호리특(胡里特)으로 선왕(先往/먼저 감)하여, 성하(城下/성밑)에서 패(敗/깨트림)하였다.
사묘아리(阿里)가 진(陣)의 앞에 비의(緋衣/비단 옷)를 입은 자(者) 20여 인을 지(指/가리킴)하며 말하길
「이는 필시(必) 적(賊)의 추장(酋)이다!」
휘병(麾兵/병사를 지휘함)하여 분격(奮擊/분발하여 공격함)하여, 모두 죽이니,
남은 무리가 대궤(大潰/크게 무너짐)하였다.
내주(來州)와 습주(隰州)의 병(兵)이 호리특성(胡里特城)을 포위(圍)하였는데,
사묘아리(阿里) 내구(來救/구원하여 옴)한다는 것을 듣고는, 곧 해위(解圍/포위를 풂)하고는 가버렸다.
도모(闍母)가 장각(張覺)을 토벌(討)하였는데, 누봉구(樓峰口) 산곡(山谷)사이로 나오는 병(兵)이 있자, 
사묘아리(阿里)와 산독로(散篤魯) 및 홀로보(忽盧補)가 3맹안(猛安)으로 격패(擊敗/공격하여 깨트림)하였다.
종망(宗望)이 도모(闍母)를 대신(代)하여 장각(張覺)의 토벌(討)하였는데,
사묘아리(阿里)는 다시 평주(平州)의 병(兵)을 패(敗/깨트림)하였다.


及伐宋,阿里別擊宋兵,敗之。
孟陽之役,阿里扼橋渡力戰。
明年,再伐宋,至保州、中山,累破之。
進圍真定,阿里與婁室、豁魯乘風縱火,焚其樓櫓,諸軍畢登,克其城。
師至河上,粘割胡撒擊走宋人,扼河津,兵數千遂渡河。
諸將分出大名境,阿里破敵四百盡殪,遂圍汴。
汴中夜出兵來焚攻具,阿里與謀克常孫陽阿禦之,其眾大潰。
還攻趙州,降之。
송(宋)을 정벌(伐)함에 이르러, 사묘아리(阿里)는 별도(別)로 송병(宋兵)을 공격(擊)하여, 패(敗/깨트림)하였다.
맹양지역(孟陽之役/1126년 1월 금의 1차 개봉 포위전)에서, 사묘아리(阿里)가 액교(扼橋/교각을 확보함)하여 (황하를) 건너 역전(力戰/힘껏 싸움)하였다.
명년(明年/다음해, 1127년)에, 다시 송(宋)을 정벌(伐)하자, 보주(保州)와 중산(中山)에 이르러, 누(累)차 격파(破)하였다.
진군(進)하여 진정(真定)을 포위(圍)하였는데, 
사묘아리(阿里)가 누실(婁室) 및 활로(豁魯)와 함께 승풍(乘風/바람을 탐)하고 종화(縱火/방화)하여,
그 누로(樓櫓/성의 망루)를 분(焚/불사름)하자, 제군(諸軍)이 마침내 등(登/오름)하여,
그 성(城)을 극(克/함락함)하였다.
사(師/군대)가 하상(河上/강의 상류)에 이르자, 점할호살(粘割胡撒)이 공격(擊)하니 송인(宋人)이 주(走/달아남)하였고,
하진(河津/나루)을 액(扼/확보함)하니, 병(兵) 수천(數千)이 마침내 도하(渡河)하였다.
제장(諸將/여러 장수)이 대명부(大名)의 경계(境)로 분출(分出/나누어 출격함)하였는데,
사묘아리(阿里) 적(破) 400을 격파(破)하고 진에(盡殪/모두 죽임)하였고, 드디어 변(汴/개봉)을 포위(圍)하였다.
변중(汴中/개봉성)에서 야밤(夜)에 출병(出兵)하여 공구(攻具/공성 도구)를 내분(來焚/태우러 옴)하였는데, 
사묘아리(阿里)가 모극(謀克) 상손양아(常孫陽阿)와 함께 방어(禦之)하니, 그 무리가 대궤(大潰/크게 무너짐)하였다.
돌아와 조주(趙州)를 공격(攻)하여, 항복(降)시켰다.


天會六年,伐宋主,取陽穀、莘縣,敗海州兵八萬人,海州降。
破賊船萬余於梁山泊。
招降滕陽、東平、泰山群盜。
盜攻範縣,擊走之,獲船七百艘。
宗弼攻下睢陽,與烏延蒲盧渾先以二千人往招壽春,具舟淮水上。
時康民聚賈船四百與壽春相近,朮列速以騎四百破康民,斬馘數千。
與當海、大㚖破賊十萬於淮南。
比至江,連破宋兵,獲舟二百艘。
宗弼至江甯,阿里、蒲盧渾別降廣德軍,先趣杭州。
去杭十餘里,遇宋伏兵二千,取我前驅甲士三十人。
阿里使諸軍去馬搏戰,伏兵敗,皆逼死于水。
宗弼至余杭,而宋主走明州,阿里與蒲盧渾以精騎四千襲之,破東關兵,濟曹娥江,敗宋兵于高橋鎮。
至明州,頗失利。
宋主已入於海,乃退軍余姚。
宗弼使當海濟師,遂下明州,執宋守臣趙伯諤,進至昌國縣。
宋主自昌國走溫州,由海路追三百餘里,弗及。
遂隳明州,與宗弼俱北歸。
천회(天會/금 2대 황제 태종의 #1연호) 6년(1128년)에, 송주(宋主/남송의 1대 황제 고종)를 토벌(伐)하였는데,
양곡현(陽穀)과 신현(莘縣)을 취(取)하고, 해주(海州)의 병(兵) 8만 명을 패(敗/깨트림)하니, 해주(海州)가 항복(降)하였다.
적선(賊船) 만여 척을 양산박(梁山泊)에서 격파(破)하였다.
등양(滕陽)과 동평(東平) 및 태산(泰山)의 군도(群盜/도적 무리)를 초항(招降/초유하여 항복시킴)하였다.
도적(盜)이 범현(範縣)을 공격(攻)하자, 격주(擊走/격퇴)하였고, 배 700 척을 획득(獲)하였다.
종필(宗弼)이 휴양(睢陽)을 공하(攻下/공격하여 함락함)하자, 오연포로혼(烏延蒲盧渾)과 함께 먼저 2천인으로 수춘(壽春)으로 가서 초유(招)하였는데, 
회수(淮水)의 상류(上)에서 구주(具舟/배를 갖춤)하였다.
이때 강민(康民/남송의 장수)이 고선(賈船/장사하는 배) 400척을 취(聚/모음)하여 수춘(壽春)과 더불어 상근(相近/멀지 않음, 가까움)하였는데, 
출열속(朮列速)이 400기(騎)로써 강민(康民)을 격파(破)하고, 수천(數千)을 참괵(斬馘/목을 벰)하였다.
당해(當海) 및 대고(大㚖)와 함께 회남(淮南)에서 적(賊) 십만(十萬)을 격파(破)하였다.
강(江)에 나란히 이르러, 송병(宋兵)을 연파(連破)하고, 배 200 척을 획득(獲)하였다.
종필(宗弼)이 강녕(江甯)에 이르자, 사묘아리(阿里)와 포로혼(蒲盧渾)은 별도(別)로 광덕군(廣德軍)을 항복(降)시켰고, 먼저 항주(杭州)로 취(趣/빨리 달려감)하였다.
가다가 항주(杭) 10여 리(里)에서, 송(宋)의 복병(伏兵) 2천(千)을 조우(遇)하였는데,
아군(我)의 전구(前驅/선두 기병) 갑사(甲士) 30인을 취(取)하였다.
사묘아리(阿里)가 제군(諸軍)으로 하여금 거마(去馬/말을 버림)하고 박전(搏戰/전투를 벌임)케 하였는데, 
복병(伏兵)을 패(敗/깨트림)하였고, 모두 물에 핍사(逼死/핍박하여 죽임)하였다.
종필(宗弼)이 여항(余杭)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송주(宋主/남송 고종)는 명주(明州)로 도주(走)하였고,
사묘아리(阿里)는 포로혼(蒲盧渾)과 함께 정병(精騎) 4천으로써 습격(襲)하여,
동관(東關)의 병(兵)을 격파(破)하였고, 조아강(曹娥江)을 제(濟/건넘)하여, 
고교진(高橋鎮)에서 송병(宋兵)을 패(敗/깨트림)하였다.
명주(明州)에 이르러, 꽤 실리(失利/손해를 봄)하였다.
송주(宋主/남송 고종)가 이미 바다로 들어갔는데, 이에 여요(余姚)로 퇴군(退軍/철군)하였다.
종필(宗弼)이 당해(當海)로 하여금 제사(濟師/병력을 늘림)하게 하였고,
마침내 명주(明州)를 하(下/함락함)하였고, 송(宋)의 수신(守臣) 조백악(趙伯諤)을 집(執/잡음)하였으며,
진군(進)하여 창국현(昌國縣)에 이르렀다.
송주(宋主/남송 고종)가 창국현(昌國)에서부터 온주(溫州)로 도주(走)하였고,
해로(海路)를 경유(由)하여 300 여리(里)를 추격(追)하였는데, 불급(弗及/미치지 못 함)하였다.
마침내 명주(明州)를 휴(隳/무너뜨림)하였고, 종필(宗弼)과 함께 모두 북(北)으로 귀환(歸)하였다.


睿宗經略陝西,駐涇州,阿里先取渭州。
睿宗趨熙河,阿里、斜喝、韓常三猛安爲前軍。
十二年,與高彪監護水運。
宋以舟師阻亳州河路,擊敗之,追殺六十餘里,獲其將蕭通。
破漣水水寨賊,盡得其大船,遂取漣水軍,招徠安輯之。
天眷間,盜據石州,阿里討之。
粘割胡撒與所部先登,遂克其城,石州平。
宗弼再伐宋,阿里已老,督造戰船。
宋稱臣,詔賜阿里錢千萬。
自結髮從軍,大小數十戰,尤習舟楫,江、淮用兵,無役不從,時人以水星目之。
爲迭里部節度使,曆順義、泰寧軍,歸德、濟南尹。
天德初,致仕,加特進,封王。
正隆例封韓國公,召赴闕,命造戰船。
以疾薨,年七十八,諡智敏。
예종(睿宗/종요宗堯, 금 5대 황제 세종의 부친)이 섬서(陝西)를 경략(經略)하였는데,
경주(涇州)에 주둔(駐)하니, 사묘아리(阿里)가 위주(渭州)를 선취(先取/먼저 취함)하였다.
예종(睿宗)이 희하(熙河)로 추(趨/달려감)하였고, 사묘아리(阿里)와 사갈(斜喝) 및 한상(韓常)의 3 맹안(猛安)을 전군(前軍)으로 삼았다.
[천회(天會/금 2대 황제 태종의 #1연호)] 12년(1134년)에, 고표(高彪)와 더불어 수운(水運/뱃길 운송로)을 감호(監護/감독하여 보호함)하였다.
송(宋)이 주사(舟師/수군)로써 박주하로(亳州河路)를 조(阻/가로막음)하자, 격패(擊敗/공격하여 깨트림)하였고,
60 여리(里)를 추격(追)하여 죽였으며, 그 장수(將) 소통(蕭通)을 획(獲/붙잡음)하였다.
연수수채(漣水水寨)의 적(賊)을 격파(破)하고, 그 대선(大船/큰 배)를 진득(盡得/모두 획득함)하였으며,
마침내 연수군(漣水軍)을 취(取)하였고, 초래(招徠/초무)하여 안집(安輯/안정시킴)하였다.
천권(天眷/금 3대 황제 희종의 #2연호) 간(間)에, 도적(盜)이 석주(石州)에 근거(據)하니,
사묘아리(阿里)가 토벌(討)하였다.
점할호살(粘割胡撒)이 소부(所部/소속 부대)와 함께 선등(先登/맨 먼저 오름)하여,
마침내 그 성(城)을 극(克/함락함)하였고, 석주(石州)를 평정(平)하였다.
종필(宗弼)이 재차(再) 송(宋)을 정벌(伐)하였는데, 사묘아리(阿里)가 이미 연로(老)하여,
전선(戰船/군선)을 독조(督造/감독하여 만듦)하였다.
송(宋)이 칭신(稱臣)하자, 조(詔)하여 사묘아리(阿里)에게 전(錢) 천만(千萬)을 하사(賜)하였다.
스스로 결발(結髮/머리를 묶음)하고 종군(從軍)하였는데, 대소(大小) 수십(數十) 번의 전투(戰)를 하였고,
더욱 주즙(舟楫/배와 노)을 습(習/익힘)하여, 강(江)과 회(淮)에서 용병(用兵/군사를 부림)하였으며,
부역(役)에 불종(不從/따르지 않음)함이 없었고, 시인(時人/그 당시 사람들)이 수성(水星)이라 목(目/일컬음)하였다.
질리부(迭里部) 절도사(節度使)로 삼았고, 순의(順義)와 태녕군(泰寧軍)을 역임(曆)하다,
귀덕윤(歸德)과 제남윤(濟南尹)이 되었다.
천덕(天德/금 4대 황제 해릉양왕의 #1연호) 초(初)에, 치사(致仕/관직에서 은퇴함)하였으며,
특진(特進)을 가(加/관직을 올림)하고, 왕(王)에 봉(封)하였다.
정륭(正隆/금 4대 황제 해릉양왕의 #3연호)에 한국공(韓國公)으로 예봉(例封/전례를 따라 봉함)하였고,
소환(召)하여 부궐(赴闕/궐에 다다름)케 하여, 명(命)하여 전선(戰船/군선)을 건조(造)하게 하였다.
질병(疾)으로서 훙(薨/죽음)하니, 78세였고, 시호(諡)는 지민(智敏/지혜롭고 민첩함)이었다.

*예종(睿宗) : 금 태조 아골타의 3남, 후실 복산씨의 1남, 초명은 종보(宗輔)이고 후명은 종요(宗堯),                   
               여진명 와리타(讹里朵), 금 5대 황제 세종 완안옹(完顔雍)의 부친으로 예종(睿宗) 추증


阿里性忠直,多智略。
兄弟相友愛,家故饒財,以己猛安及財物盡與弟愛拔里。
愛拔里不肯受,逃避歲余,阿里終與之。
사묘아리(阿里)의 성정(性)이 충직(忠直)하였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형제(兄弟)가 서로 우애(友愛/형제 사이에 정이 있음)하였고, 집이 요재(饒財/재물이 넉넉함)한 연고(故)로,
자기의 맹안(猛安)과 더불어 재물(財物)을 동생 애발리(愛拔里)에게 모두 주었다.
애발리(愛拔里)가 받길 수긍(肯)하지 않아, 세여(歲余)로 도피(逃避)하였는데,
사묘아리(阿里)가 마침내 주었다.


贊曰: 斜卯阿里、突合速、烏延蒲盧渾、赤盞暉、大㚖、阿离補等六人,
皆收國以來所謂熊羆之士、不二心之臣也,其功有可錄者焉。
찬(贊)하여 말한다.
사묘아리(斜卯阿里), 돌합속(突合速), 오연포로혼(烏延蒲盧渾), 적잔휘(赤盞暉), 대고(㚖), 아리보(阿离補) 등(等) 6인은,
모두 수국(收國/금 1대 황제 태조의 #1연호) 이래(以來)로 소위(所謂) 웅비지사(熊羆之士,곰 같은 장사, 힘센 장사)로, 두 마음이 없는 신하(臣)였으니,
그 공(功)을 기록(錄)하는 것이 옳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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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고려전
사묘아리의 아버지는 혼탄인데, 목종 영가 때 완안부에 귀부하였고 수차례 전공이 있었다.
사묘아리가 17세에 백부 호마곡을 따라 사도를 토벌하였는데, 사도의 동생 사리지를 사로잡았다.
고려가 갈라전에 9성을 축성하자 혼탄이 공격하여, 목리문전에서 고려군을 만나 오랫동안 힘껏 싸웠는데
사묘아리가 창을 들고 고려군의 진중으로 돌진하여 그 장수를 찌르자, 고려군이 마침내 궤멸하였다.
혼탄과 더불어 석적환이 도문수에서 합병하였는데, 사묘아리가 선봉장이 되어 고려군을 깨트리고 2성을 취하였다.
고려가 쳐들어 오자 아군이 요해처에 주둔하며 수비하자 고려군이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곧 회군하였다.
사묘아리가 회군하는 고려군을 갈라수까지 추격하였는데 고려군이 얼음 위를 다투어 도주하자
사묘아리가 기세를 타고 고려군을 공격하여 거의 다 죽이고는 석적환과 합병하였다.
길에서 고려군 5만과 조우하니 사묘아리가 공격하였고, 다시 석적환과 함께 고려군 7만과 조우하자
사묘아리가 선봉으로 공격하여 고려군을 크게 깨트렸다.
석적환이 말하길
   <네가 하루 동안에 강한 적을 세 번이나 격파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잊겠느냐?>
이에 후하게 하사하였다.
알새와 오도본이 고려의 타길성을 공격하였는데 사묘아리가 성벽을 뚫어 문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자 병으로써 이를 지키게 하였고,
다음날 아침에 마침내 그 성을 함락하였다.
오도본이 갑옷을 두른 말을 하사하였다.


VS 거란전
태조가 요나라의 영강주를 공격할 때 종군하여 함락시켰고, 맹안을 수여받았다.
또 종군하여 신주와 빈주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요나라 군이 패근 홀사리의 성을 공격하여 오자 사묘아리가 100 여기를 인솔하여 구원하였다.
당시 요군은 수만 명이었고 사묘아리의 병은 적으니, 이에 영을 내려 군사의 옷을 찢어 깃발을 많이 만들어
산골짜기 사이로 나오니 요군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달아나 가버렸다.
항복했던 소주와 복주가 배반하였는데, 무리가 10만에 이르렀다.
근방의 여진인들이 모두 태위 호사의 집을 보호하여 보루를 쌓고 굳게 지켰다.
적이 몇 겹으로 포위하자, 성안의 양식과 꼴이 모두 없어졌는데,
소와 말은 그 말갈기와 꼬리를 서로 먹어대고 있었고, 사람 역시 자식을 바꿔 먹었다.
야밤에 두 사람이 줄을 매달아 성을 탈출하여 사묘아리에게 위급함을 고하였다.
이에 사묘아리가 성에 다다르니, 성 안밖에서 협공하여 적군을 벽리밀한수 상류에서 격파하고는 
거의 죽였는데 그로 인해 물이 흐르지 않았다.
포리고호십길수와 마한도에서 무릇 10여 번을 싸워 수십만 무리를 격파하였다.
거란과 해족이 배 1천 척을 모아 바다로 들어갔다.
사묘아리가 배 27척으로 요격하였는데, 유시에 명중되어 배 가운데에 누워 있었는데 한밤중에 비로소 깨어났다.
적선이 이미 왕가도로 들어갔는데 곧 밤에 바닷길로 따라 추격하여 왕가도에 이르니,
적이 달아나 험한 곳에서 막았으며 사묘아리가 기병으로 요격하였는데,
다시 유시를 맞았으나 힘껏 싸워 물러서지 않았고 마침내 적을 격파하고는, 그 배를 모두 획득하였다.
이에 소주와 복주 및 파속로가 모두 평정되었다.
현주를 공격하였고 영산현을 항복시켰으며 양어무를 취하였으며,
요 야율여도의 병을 깨트렸는데 공이 모두 으뜸이었다.
후에 산도로와 함께 고주에 주둔하였는데 
거란의 소고아와 구근이 흥중부의 병력 수만과 더불어 호리특채를 공격하니, 사묘아리가 8모극의 병으로 구원하였다.
호리특에 도착하여 성 밑에서 거란군을 깨트렸다.
사묘아리가 거란군 진영의 앞에 비단 옷을 입은 자 20인을 가리키며 말하길
   <이는 필시 적의 추장이다!>
병사를 지휘하여 돌격하여 모두 죽이니, 거란의 남은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내주와 습주의 거란군이 호리특성을 포위하였는데 
사묘아리 구원하여 온다는 것을 듣고는 곧 포위를 풀고 가버렸다.
도모가 장각을 토벌하였는데 누봉구 산골짜기로 나오는 병력이 있자
사묘아리와 산독로 및 홀로보가 3맹안으로 공격하여 깨트렸다.
종망이 도모를 대신하여 장각을 토벌하였는데 사묘아리는 다시 평주의 군대를 깨트렸다.


VS 북송전
송을 정벌함에 이르러 사묘아리는 별도로 송군을 공격하여 깨트렸다.
1126년 1차 개봉 포위전에서는 사묘아리가 교각을 확보하여 황하를 건너 힘껏 싸웠다.
다음 해인 1127년에 다시 송을 정벌하자 사묘아리는 보주와 중산에 이르러 누차 적을 격파하였다.
진군하여 진정을 포위하였는데, 사묘아리가 누실 및 활로와 함께 바람을 타고 방화하니 진정성의 망루가 불탔고
여러 군이 마침내 성을 올라 진정을 함락하였다.
군대가 황하의 북쪽에 이르렀고, 
점할호살이 송군을 공격하니 송군이 도주하였고 나루터를 확보하여 마침내 병사 수천이 황하를 건넜다.
여러 장수가 대명부의 경계로 나누어 출격하였는데, 사묘아리가 적 400을 격파하여 모두 죽이고 마침내 변(개봉)을 포위하였다.
개봉성에서 송군이 야밤에 출병하여 공성도구를 불태우러 왔는데,
사묘아리가 모극 상손양아와 함께 방어하니, 송군이 크게 무너졌다.
회군하면서 조주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VS 남송전
1128년에 남송의 고종을 토벌하였는데 양곡현과 신현을 취하고, 해주의 남송군 8만 명을 깨트리니 해주가 항복하였다.
적선 만여 척을 양산박에서 격파하였다.
등양과 동평 및 태산의 도적 무리를 초유하여 항복시켰다.
도적이 범현을 공격하자 격퇴하였고 배 700 척을 획득하였다.
종필이 휴양을 공격하여 함락하자, 오연포로혼과 함께 먼저 2천인으로 수춘으로 가서 초유하였고, 
회수의 상류에서 배를 준비하였다.
이때 남송의 장수 강민이 장삿배 400척을 모아 수춘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출열속이 400기로써 강민을 격파하고 수천 명의 목을 벴다.
당해 및 대고와 함께 회남에서 적 십만을 격파하였다.
강에 나란히 이르러 남송군을 연파하고, 배 200 척을 획득하였다.
종필이 강녕에 이르자 사묘아리와 포로혼은 별도로 광덕군을 항복시켰고, 먼저 항주로 빨리 달려갔다.
항주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서 남송의 복병 2천을 만났는데, 아군의 선봉 기병 30명이 당했다.
사묘아리가 모든 군사에게 말을 버리라 명하고 격전을 벌였는데 
마침내 남송의 복병을 깨트리니 쫓기던 남송군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종필이 여항에 이르렀으나 남송 고종은 명주로 도주하였고
사묘아리는 포로혼과 함께 정병 4천으로 습격하여 동관의 남송군을 격파하였고 조아강 건너 고교진에서 남송군을 깨트렸다.
명주에 이르러서는 꽤 손해를 보았다.
남송 고종이 이미 바다로 들어갔는데 이에 여요로 철군하였다.
종필이 당해로 하여금 사묘아리를 도우라 하였고 마침내 명주를 함락하고 송의 장수 조백악을 사로잡았으며, 
진군하여 창국현에 이르렀다.
남송 고종이 창국현에서부터 온주로 도주하자 사묘아리가 바닷길을 경유하여 300 여리를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명주를 무너뜨리고 종필과 함께 모두 북으로 돌아왔다.
예종(종요)이 섬서를 경략하였는데 경주에 주둔하고는 먼저 사묘아리에게 위주를 취하게 하였다.
예종(종요)이 희하로 달려가 사묘아리와 사갈 및 한상의 3 맹안을 전군으로 삼았다.
1134년에 고표와 함께 뱃길 운송로를 감독하여 보호하였다.
남송이 수군으로 박주하로를 가로막자 공격하여 깨트렸고 60여 리를 추격하여 죽였으며 남송의 장수 소통을 사로잡았다.
연수수채의 남송군을 격파하고 큰 배를 모두 획득하였으며 마침내 연수군을 취하였고 초무하여 안정시켰다.
천권(1038년~1040년) 간에 도적이 석주에 근거하니 사묘아리가 토벌하였다.
점할호살이 소속 부대로 성에 맨 먼저 올랐으며, 마침내 석주성을 함락하니 석주가 평정되었다.
종필이 재차 남송을 정벌하였는데, 사묘아리가 이미 연로하니 군선 건조를 감독하게 하였다.
남송이 칭신하자 조하여 사묘아리에게 천만전을 하사하였다.


사묘아리는 스스로 머리를 묶고 종군하였는데,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전투를 치렀으며,
더욱 수군에 관한 것을 익혀 강주와 회주에서 군사를 부렸으며,
그 어떤 부역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수성(水星)이라 일컬었다.
질리부 절도사로 삼았으며, 순의와 태녕군을 다스리다 귀덕윤과 제남윤에 임명되었다.
천덕(1149년~1153년) 초에 치사(은퇴)하니 특진을 가하였고 왕에 봉하였다.
정륭(1156년~1161년) 간에 한국공으로 봉하고는 궐에 소환하여 군선 건조의 명을 내렸다.
병에 걸려 훙하니 78세였고, 시호는 지혜롭고 민첩하다는 뜻의 지민이었다.

사묘아리의 성정이 충직하였고 지략이 많았다.
형제간에도 서로 우애가 깊었는데, 집에 재물이 넉넉하니 자신의 맹안과 재물을 모두 동생 애발리에게 주려 하였다.
애발리가 받길 원치 않았고 세여로 도피하였는데, 결국 사묘아리가 모두 주었다.


원나라 승상 탈탈은 찬하여 말한다.
   <사묘아리, 돌합속, 오연포로혼, 적잔휘, 대고, 아리보 등 6인은
    모두 태조가 건국한 이래로 소위 곰과 같은 장수들로 두 마음이 없는 신하였으니
    그 공을 기록하는 것이 옳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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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완안부 9대 추장 영가 때 아버지 혼탄이 완안부에 귀부
2. 17세 사도 토벌전에서 사도의 동생 사리지를 잡음
3. 목리문전에서 고려군과 오랫동안 싸움
4. 목리문전에서 고려군에 난입하여 장수를 죽이니 고려군이 궤멸
5. 도문수에서 선봉장으로 고려군을 격파하고 2성을 함락
6. 고려가 공격해 오자 요해처를 수비하다 고려가 철군하자 갈라수까지 추격하여 고려군을 격파함
7. 고려군 5만과 조우하여 격파
8. 같은 날 고려군 7만과 또 조우하여 격파
9. 고려의 타길성 공성전에서 성벽을 뚫어 성을 함락함
10. 태조를 따라 거란의 영강주를 함락하고 맹안(병력 1천)을 수여받음
11. 거란 신주, 빈주 함락
12. 홀사리성을 공격하는 요군 수만 명을 겨우 100기로 계략을 부려 철군시킴
13. 항복했다가 다시 배신한 소주와 복주의 10만 반란군과 10여 차례 싸워 격파하여 강물을 시체로 막히게 함
14. 거란과 해족이 1000척의 배로 바다로 도주하자 27척을 이끌고 추격함
    화살에 두 번 맞아 생사가 위태로웠으나 힘껏 싸워 도주한 거란족과 해족을 격파하고 배를 모두 획득함
15. 소주, 복주, 파속로 평정
16. 현주, 영산현, 양어무 함락
17. 야율여도의 거란군 격파
18. 거란 소고아+구근의 병력 수만을 8모극 800 명으로 격파함.
19. 장각 토벌전에서 누봉구의 잔당 처리, 평주 함락.
20. 1차 개봉 포위전에서 교각을 확보하고 황하를 건넘
21. 2차 개봉 포위전에서 보주, 중산, 진정 함락
22. 황하를 건너 북송군 400을 죽이고 개봉 포위 참여
23. 야밤에 북송군 1만이 급습하였으나 이를 격퇴
24. 회군하면서 조주 항복시킴
25. 1128 남송 토벌전에서 양곡현, 신현 함락
26. 해주 남송군 8만 명 격파
27. 양산박에서 남송 수군 1만 척 격파.
28. 등양, 동평, 태산 도적떼 항복시킴
29. 도적떼가 범현을 공격하자 격퇴하고 배 700척 획득.
30. 수춘을 항복시키고 회수의 상류에서 배 준비
31. 당해+대고와 함께 회남에서 남송군 10만 격파, 배 200척 획득
32. 광덕군 항복시킴, 항주의 남송 복병 2천 격파
33. 포로혼과 함께 정병 4천으로 동관, 고교진 함락
34. 남송 고종이 명주로 달아나자 명주를 공격하였으나 큰 손실을 입음
35. 남송 고종이 바다로 도주하자 여요로 철군
36. 당해와 더불어 명주를 함락하고 조백악을 사로잡음
37. 남송 고종이 있는 창국현으로 갔으나 고종은 온주로 도주
    사묘아리가 바닷길로 300리를 추격하였으나 실패
38. 명주를 무너뜨리고 회군
39. 종요의 섬서 공략전에 1맹안(1천명)을 이끌고 참여해 위주 함락
40. 1134년 수운로 감독
41. 박주하로에서 남송 수군 격파, 60리를 추격하여 소통을 사로잡음
42. 연수수채의 남송 수군 격파
43. 1038년~1040년 사이에 석주의 도적떼 토벌
44. 종필의 남송 정벌전에는 이미 늙어 참전치 못하고 군선건조 감독함
45. 남송이 칭신하고 재물을 바치자 희종은 사묘아리에게 천만전을 하사함
46. 원 승상 탈탈에 의해 곰과 같은 장수란 평을 들음.

-전시에 늘 머리를 묶고 종군하여 수십 번의 싸움을 치름.
-남송 정벌전 당시부터 수전을 익혀 <수성(水星)>이라 불림.
-왕에 봉작됨
-늙어서도 황제의 명에 의해 군선을 건조함
-형제간의 우애가 깊음
-자신의 모든 것을 동생 애발리에게 주었음.


-동시기 고려의 척준경, 송의 한세충, 양재흥과 비견되는 맹장으로 보입니다.
 지략을 겸비하였고, 수전도 익혔으며 여진 내전, 고려전, 거란전, 북송전, 남송전에 모두 참전한 백전 노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결국 왕에 봉해졌으며 장수를 누리다 죽었으니 엄청난 인생을 살다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끝-